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세열 Sep 27. 2020

라파즈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 날

La Paz, Bolivia

오늘은 라파즈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난 이야기를 해줄게요.

꽤 쌀쌀한 날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산프란시스코 광장 구석에 앉아서 성당을 그렸어요. 한참 그리다 보니, 해가 성당 뒤로 넘어가 버려 성당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구름이 해를 가려주기를 기다리며 넋 놓고 광장을 바라보는데 한 꼬마 녀석이 어떤 아저씨 구두를 닦고 있네요. 당신도 알다시피 보통 구두를 닦는 큰 녀석들은 얼굴을 꽁꽁 싸매고 일을 하는데 이 꼬마 녀석은 그저 맨 얼굴로 헤헤 웃으며 구두를 닦고 있었어요. 

그때 즈음 구름이 해를 가려주고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며 스케치북과 성당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그 꼬마 녀석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당연히 서로 시선을 피하거니 했는데 녀석은 머리긴 동양인이 구석에 앉아 무언가 하고 있으니 호기심이 생겼나 봅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쌩긋 웃더군요. 어찌 그런 미소를 받고 모른 척 고개를 돌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리 와하고 손짓을 했더니 어느새 보이지 않던 동생 녀석까지 쪼르륵 제게 달려옵니다. 커다란 구두닦이 통을 들고.


“이리 앉아봐.”





 손짓을 하니 녀석들이 바닥에 털썩 앉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림을 그리던 큰 스케치북을 덮고 작은 스케치북을 꺼냈어요. 몇 장 남지 않아서 무척 아끼던 녀석을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들 얼굴을 그려줬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약간의 장난기에 조금 더 우스꽝스럽게 그렸겠지만 이번에는 구두약에 덮인 그 맑은 눈과 미소를 제대로 그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럴만한 재주가 없어 또다시 별 볼 일 없게 그려버렸네요. 실력이 부족한 것이 오늘따라 참 서글펐습니다. 그래도 녀석들은 이 작은 선물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자기들끼리 그림을 자기 얼굴에 대보며 킥킥대고 웃습니다..






나중엔 작은 녀석이 내 무릎 위에 아주 않고 내 큰 스케치북을 넘겨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던 성당을 보고 “여기다!” 하고 손가락으로 성당을 가리키다가 아예 제 스케치북을 제 손으로 들고 갑니다. 잠시 후 돌아온 스케치북에는 녀석 손에 잔뜩 묻어있던 구두약 때문에 손가락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먹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떨어져 그림은 번져버렸죠. 평소 같으면, 잔뜩 화낼 일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녀석들이 기억나겠구나, 그래서 잘됐구나 싶었지요. 아이들이 스케치북을 모두 구경하고 나서는 항상 그렇듯 나는 얼굴 그림과 녀석들을 찍은 다음에 작은 휴대용 포토프린터로 아이들 사진을 뽑아 주었습니다. 녀석들은 그림보다도 사진을 더 좋아하네요.


차오! 차오!


우리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앉아서 약간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그림을 마저 그렸습니다. 해질 무렵 그림을 완성을 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려 하는데 다시 그 꼬마 녀석들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수줍게 검은손으로 웬 비닐봉지를 내밉니다. 받아보니 아직 식지 않은 작은 팬케이크가 담겨있었어요. 그새 이걸 내게 주겠다고 어딘가에서 급하게 사 왔나 봅니다. 팬케이크를 바라보니 아까 거리에 앉아서 구두를 닦던 모습과 그 작은 검은손이 겹쳐서 순간 어찌나 눈물이 나려던 지 혼났습니다.
 

그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선물과 대가를 받아봤습니다. 꽤 큰돈을 받아보기도 했고 맛있는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귀한 선물을 받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팬케이크가 지금까지 받아봤던 선물 중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가장 소중한 선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라파즈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 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

매거진의 이전글 우유니를 그리며 오래도록 상상했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