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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열 Oct 16. 2020

나와 닮은 사람, 반가운 사람

Barcelona, Spain


여행 중 새로운 사람도 참 좋지만

사실은 나와 닮은 사람이 가장 반가운 사람.

그중에서도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여행을 그리는 사람이 가장 반가운 사람.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몰래 그림을 등 뒤에서 훔쳐보곤 했다. 만약 그 사람에게도 내가 반가운 사람이라면 우리는 서로 스케치북을 바꿔 들고 한 장 한 장 넘겨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외출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날이면 가우디의 까사 바뜨요 앞에 앉아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가우디 건축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것도, 그 앞에 가득한 관광객들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한 날은 구경 대신에 작은 스케치북을 열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는 동안 옆자리에 많은 사람이 앉았다 일어났다. 대부분 내게 무관심했지만 가끔씩 중국에서 온 여행자들이나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다는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그런 사람들과 가끔씩 대화를 하며 그림을 완성할 즈음 옆 벤치를 바라보니 누군가도 작은 수첩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 슬며시 그림을 훔쳐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수백 번을 말해도 여전히 촌스러운 발음으로

“웨얼 아 유 프롬?”

이라고 물으니 상대방도 또박또박

“아이 엠 프롬 코리아.”

라고 대답했다.

“한국 분이셨구나!”

“한국 사람이세요?”


아직도 ‘웨얼 아 유 프롬?’ 특히 R발음을 억지로 더 꼬아 물어봤는데 이렇게 또박또박한 ‘아임 프롬 코리아’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그렇게 서로 민망할 때가 없다.

이젠, 외모만 보고 유럽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그리고 한국, 중국, 일본인은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이렇게 또 실수를 한다. 아마 나도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에 꼬질꼬질한 얼굴이 ‘유럽을 여행하는 한국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겠지.

그래도 그렇게 민망하지 않은 척 다시 인사를 하고 서로의 스케치북을 바꿔 그림을 구경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늦은 오후 바람이 차가워질 때 즈음 물었다.

“저기, 시간 괜찮으시면 카페로 옮겨서 이야기 더 할까요?

 제가 커피를 꼭 한 잔 사드리고 싶은데.”

“네?”

그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몇 달 전 볼리비아에서 스테이크 뷔페에서 밥을 먹고 일어나는데 함께 식사를 한 누나가 먼저 계산을 해버렸단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제가 후식이라도 사드릴게요.”                                            

그러자 누나는

“됐거든, 나중에 유럽 가서 너보다 동생 만나면 커피라도 한잔 사줘.”

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디저트를 누군지도 모를 어린 여행자에게 양보했다.


이렇게 늘 나보다 나이 많은 여행자들은 동행하는 중 한 번이라도 무엇이라도 사주려 했고 후식이라도 보답하려 하면 언제나 ‘나중에 너보다 더 어린 여행자를 만나거든 커피라도 대신 사주라’는 같은 대답만 할 뿐이었다. 한국 여행자도, 다른 나라 여행자도.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키고 싶어 유럽에서 처음 만난, 나보다 어린 그녀에게 커피를 꼭 사고 싶었다.





우리는 가까운 한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글을 쓴다고 했다. 그리고 이미 작은 소설책을 한 권 출간하고는 여행을 떠나 온 거라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여행 이야기는 소설책의 한 대목 같이 즐거웠다. 대신 나는 핸드폰에 저장한 스케치와 벽화를 보여주며 지난 여행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커피 잔이 다 비었을 무렵 여행자들끼리 으레 주고받는 뻔한 대화를 마치고 진짜 자신의 깊은 이야기를 꺼낸다. 서로 잘 알지 하는 그리고 앞으로도 더 알지 못할 것 같은 ‘타인’에게만, 그리고 낯선 곳에서만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속 고민 같은 것들을.

며칠 후 그녀가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날 다시 만나 서로의 수첩에 작은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못생긴 글씨로 그녀의 수첩 한편에 무언가 빼곡히 적었고, 그녀는 그림 같은 글씨로 작은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줄에 ‘만나서 반가웠어요. 소설 속에서 만나길.’이라고 썼다.


세상에 소설 속이라니! 그 한마디에 어떻게 설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서울도 유럽의 어느 도시도 아닌 소설 속이라는데! 그녀가 떠나고 오래도록 그녀의 소설 속 여행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나는 어떤 여행자로 그려질지도.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 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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