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rope
나도 처음엔 벽화를 그저 재미로 그렸어.
몇 시간 동안 벽에 그림을 그리고 호스텔 홍보 스티커 다섯 장을 받았어도 진심 어린 “Amigo! Gracias!_(친구! 고마워!”)라는 인사가 행복했고 체크아웃할 때 그림 값 대신이라고 방값을 깎아주거나 받지 않으면 또 얼마나 좋았던지.
그리고 그 호스텔에서 모두 아는 사람이 되는 기분도 좀 괜찮아. 조금 과장하자면 스타지!
그래서 다들 벽화 그리고 있는 내게 와서 인사를 하고 친한 척을 해. ‘뷰티풀! 원더풀!’을 외치면서. 별 관심 못 받는 아시아 남자 여행자인데도! 게다가 귀여운 유럽 아가씨가 먼저 다가와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자고 한 적도 있지. 내 연락처도 물어보면서! 한국에서도 나한테 연락처 먼저 물어보는 아가씨도 없었는데 말이야!
벽화는 어떻게 그렸냐고?
보통 호스텔에 그림 그리고 싶은 벽이 있고 주인이 그림을 좋아한다 싶으면 넌지시 이야기해, 벽화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럼 대부분 OK라고 말하고 내게 벽 하나 내주지.
그렇게 여행 다니며 벽화를 그리니 자신감이 붙었어. 그래서 한 번은 도착하기도 전에 호스텔에 먼저 연락해서 ‘난 이런 그림을 그리며 여행 다녀요. 벽화를 그려줄 테니, 재워 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물어봤어. 그러곤 흔쾌히 OK를 받았지.
그땐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 어찌나 좋았던지. 그런데 그렇게 인정받았다 생각하니 욕심이 나는 거야. 예전에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기분이 좋았는데, 갑자기 계산하기 시작했어.
‘이걸 그려주는 기간은 이 호스텔을 위한 거니까 당연히 재워 줘야 하고 그리는 동안 먹는 밥값, 재료비 내가 소비한 시간… 이런 것까지 따지면 며칠은 더 재워 줘야 하는데…. 게다가 한국에서 벽화 그리면 얼마나 받았는데!’라고
그런 생각이 한번 드니 갑자기 더 이상 벽화를 그리고 싶지 않아 진 거야. 그리는 이유가 사라졌거든. 생각해봐 이틀 동안 생각하고 그려도, 절약되는 방값이랑 그 기간 동안 드는 생활비, 재료비, 시간을 비교해 보면 아무리 해도 내가 손해거든. 그렇게 돈으로 생각하니 모든 의미가 사라졌어.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목적지의 호스텔에 ‘벽화를 그려줄 테니, 소파라도 잘 수 있는 곳 좀 주세요’라고 했던 제안을 상대방이 거절해버렸어. 그가 아무리 정중히 거절을 했어도, 내가 받아들이기엔 궁상맞은 잡상인 취급으로 들렸고(이미 내 마음은 삐뚤어 질대로 삐뚤어졌으니까.) 더 이상 벽에도 스케치북에도 그리고 싶지도, 그릴 수도 없어졌어.
그렇게 펜을 놓고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봤어. 내가 왜 펜을 들고 여행을 시작했을까?
아! 그리는 즐거움 때문에 그리면서 여행을 했었지. 내 흔적을 곳곳에 남기고 다니는 즐거움. 친구들이 호스텔에 가서 내 벽화를 봤다고 연락을 해주는 즐거움, 호스텔 주인들도 벽화 때문에 나를 친구로 대해주는 즐거움, 이런 즐거움 때문에..
결코 처음엔 돈이라는 이유는 전혀 없었어.
그렇게 욕심을 버리고 나니 그리는 것이 다시 즐거워지더라.
노래를 부르며 여행하는 이유가 뭐야? 오늘이 첫 번째 날인데, 유럽에서 돈 좀 벌어보겠다고 무거운 기타를 집에서부터 짊어지고 온건 아니지? 그런데 어느 날 돈 욕심이 날 때가 올 거야. 오늘은 12유로 벌었다고 이렇게 들뜨고 즐거워하는데, 어느 날은 20유로를 벌어도 ‘오늘은 공쳤네’라며 인상 쓸 때가 있을 거야.
그런 날이 오면,
오늘 네가 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 잘 생각해봐!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 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