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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열 Oct 31. 2020

방콕에 우리 집이 있었다.

Bankok, Thailand

“딸랑딸랑 종소리 울리면 뛰어나가 사 먹던

 얼음에 파묻힌 과일이 그립다.”


인도에서든 남미에서든 여행에서 지칠 때 즈음이면 우리는 방콕을 노래 불렀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사 먹던 망고 셰이크와 연유 가득한 아이스커피를 그리워했고 카오산로드의 조미료 가득한 팟타이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방콕은 여행하는 동안 어느 휴양도시보다도, 한국보다도 그립고 간절하게 원하던 여행자들의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많은 여행자들이, 게다가 다른 곳에선 한인 숙소를 피하던 사람들 조차도, 이 도시에서만큼은 한인 숙소에서 지내곤 했다. 언제 어디를 여행하다 돌아와도

“다녀왔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마치 방콕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곳에 돌아온 것처럼.


거의 반년 만에 방콕에 왔고 집처럼 ‘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12시가 넘은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던 사장님은

“세열 씨, 잘 다녀왔어요?”

라고 가볍게 인사한다. 나는 반년 만이라 너무 반가웠는데 그 가벼운 인사가 살짝 아쉬워 대답했다.

“남미까지 갔다가 반년 만에 온 건데.”

“하하, 벌써 그렇게 오래됐나요? 사람들이 하도 많이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가끔 헷갈려요. 이 년 만에 오는지, 이 주 만에 오는지. 그래서 종종 사람들이 좀 서운해하죠. 미안해요. 멀리도 다녀왔네요!”




방콕엔 여러 한인 게스트하우스가 있지만 그곳의 주인과 머무는 여행자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서로 꽤나 달랐다. 그중 여유롭고 부담 없는 편안함 때문에 폴 게스트하우스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방콕에 올 때마다 폴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차가운 타일이 깔려있는 거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곳의 거실이 특별한 점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멋진 가구로 채워진 것도, 책으로 가득 찬 곳도 아니었고 대단한 풍경이 보이는 곳도 아니었다. 게다가 시원하게 넓지도 않았으며 벽에 발린 하얀 페인트 조차 손때가 가득한 그저 그런 낡은 공간이었다. 사실 어쩌면 거실이라기보다 현관이나 통로에 가까운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곳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

쪼그려 앉아서 노트북을 하는 사람들.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잠시라도 외출을 할 때면 이렇게 늘어져있는 사람들 다리를 요리조리 피해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늘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고 거실에 있는 사람들도 “잘 다녀오세요.”라고 다시 인사했다. 이렇게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소한 모습이 이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가끔 오지랖이 넓은 아저씨를 만난다면 오늘의 스케줄을 모두 말해줘야 하고 가장 싼 교통편에 대해서 적어도 십 오분 정도는 지루하게 들어야 하기도 했지만.


만약 이 거실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이렇게 사람들끼리 부대낄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그 잦은 부대낌이 실증이나 대부분 시원한 카페로 나가 시간을 때우거나 침실에서 아예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곳이 입구 바로 앞에 있지 않았더라면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풍경도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거실은 적당한 크기와 적당한 위치에 있었기에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만의 인연을,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래서 이 거실이 특별할 것도 없지만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왔더니 그 거실을 매번 청소하던 태국 아주머니 대신에 머리가 길고 윗옷을 입지 않은 남자가 매일 아침 빗자루 질을 하고 있다. 청소를 하던 이는 차이라는 남자였고 몇 달 전부터 여행을 잠시 멈추고 이 게스트하우스의 매니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우연히 그와 대화하던 중 그의 태국 친구가 나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 날 밤, 셋이 함께 어느 재즈 바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알코올이 들어있지 않은 칵테일을 마시며 그리고 비밀이라며 이야기했다.

“사실 제가 새 사장이 될 거예요. 이름은 Where is Chai Guesthouse가 될 거고요.”

그의 말을 듣고 갑작스럽게 폴 게스트하우스가 곧 없어진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티 내지 않고 물었다.

“그러면 여행은 오랫동안 멈추겠네요. 이름은 왜 차이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Where is가 붙어요?”

“아니에요. 전 여행 계속할 거예요. 외출도 자주 할 거고요.

대신 이곳에 지내는 사람들이 모두 주인이 되게 만들 거예요. 제가 없어도 여행자들끼리 서로서로 어울리고 도우며 지내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땐 다른 한 여행자가 저 대신 사장이 되는 거죠.”

“진짜 그렇게 되면 재미있겠는데요?”

“네. 이상이 이상으로 끝나지 않은 게스트하우스를 만드는 거죠!”

그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어느새 나는 아까의 아쉬움을 잊고 그의 새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기대감에 젖어버린다.

“그럼 그리기로 했던 벽화는 새 사장님과 Where is Chai 게스트하우스를 위한 개업 선물로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리고 싶은 곳 어디든! 그림은 그리고 싶은 데로 그려도 좋아요!

그는 여전히 환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다음 날 늦은 아침, 일어나자마자 입구 바로 오른편에 있는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치림의 ‘배낭여행자의 노래’를 들으며.





좋아하는 공간에

좋은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언제라도

좋은 일.


이곳에서 누워서, 앉아서, 서서 다들 여행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작은 나무 탁자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쪼그려 앉아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다. 누구는 인도로, 누군가는 미얀마로, 다른 누군가는 더 먼 곳 어딘가로.

여행 중이지만, 다들 여행을 꿈꾸고 있다. 이곳에서.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 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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