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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영 Apr 12. 2024

"'커먼즈'는 언제나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어요"

[인터뷰 전문] 신간 '커먼즈란 무엇인가'(빨간소금) 한디디 작가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를 쓴 한디디 작가. 출처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오마이뉴스에 4월 7일자로 신간 '커먼즈란 무엇인가'를 쓴 한디디 작가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링크 : https://omn.kr/283lx) 짧은 인터뷰 기사에서 못 다 풀어낸 전문을 작가의 동의를 받고 브런치스토리에 게재합니다. 해당 인터뷰는 4월 1일 'R커먼즈'에서 진행됐습니다.


- 책에서는 '커먼즈'가 무엇인지 270쪽에 걸쳐 소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커먼즈'가 무엇인지를 짧게 소개해준다면요?


커먼즈가 무엇일까요? 한국에서 생수가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1994년도라고 해요. 그 전까지 사람들에게 수퍼에서 물을 사먹는다는 것은 정말 생경한 일이었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에게 물은 당연히 상품이지만, 봉이 김선달이 물을 팔았다는 것이 희대의 사기로 회자되는 것은 물이 언제나 상품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물은 그것을 둘러싼 우리의 관계 속에서 누군가 소유하고,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상품이 되기도 하고 혹은 높으신 분들이 관리하며 나누어주는 자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커먼즈는, 상품으로 사고 팔거나, 높은 분들이 정한대로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어떻게 나눌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 혹은 그러한 관계 자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커먼즈적 관계가 오랜 세월 인류가 공동체를 만들고 집단적으로 살림살이를 꾸려온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땅과 바다, 강과 숲과 같은 세계를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 속에서, 그러한 환경의 일부로 살아온 거죠. 물론 노예제와 귀족제처럼 위계적인 신분과 계급구조가 만들어진 사회들도 있지만, 그런 곳에서조차 커먼즈는 광범위하게 남아있었고 민중의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한편,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커먼즈로부터 분리하며 시작됩니다. 영국의 인클로저가 그러한 분리의 과정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커먼즈에서 분리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몸뚱이, 노동력을 팔아서, 즉 임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스스로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것이죠. 즉, 커먼즈는 임노동과 다른 방식의 (상품화되지 않은 집단적 노동으로) 살림살이를 꾸리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24시간으로 환산하면 자본주의는 단 4초에 불과한 시간을 차지한다고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 너무나 파멸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은 점점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치우기 위해 지구를 자원, 혹은 땔감으로 삼는 체제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고요. 이런 맥락에서 커먼즈는 인류가 지구에서 살림을 꾸려온 공통의 방식이라는 것 이외의 또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상품으로 만드는 것을 멈추고, 그와 다른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운동이라는 의미죠.


- 작가님의 현재 삶 속에서 '커먼즈'를 실천하는 부분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면 어떨까요?


음, 저는 뭘 살때 포인트 적립하는걸 하지 않습니다. 언뜻 커먼즈랑 관계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꽤 관계 있지 않을까라고 내심 생각하는데요. 어느 시점부터 이 포인트 카드 같은게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자본주의랑 관계 없던 부분이 갑자기 상품의 영역이 될 때 커먼즈가 어떻게 자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지 제일 잘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소비를 하면서도 아껴서 포인트를 모으고 있다는 기분이나 만족감을 들게 하거나, 그런 자잘한 부분들이 의외로 우리의 욕망을 조정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뭔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삶과 욕망을 그런 ‘기획'에 장악당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제 마음 어딘가에 있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저는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같은 것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어요. 사실, 돈이 없으니까 못하는 거기도 하지만, 돈이 있어도 안 할 거라는 마음은 있습니다. 제가 책에 빈고라는 커먼즈 은행의 실험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런 기분들을 좀더 구체적인 대항 기획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금융실험입니다.


또 하나 소개하자면 지금 이 공간인 R커먼즈를 제가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하나의 커먼즈 실천으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서 대학이 거의 기업에 인재를 양성하는 인력훈련소처럼 취급되고, 지식이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R커먼즈는 지식, 즉 앎을 커먼즈로서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들의 공간입니다. 갈 곳 없는 연구자들이 편하게 와서 공부하고 세미나할 수 있는 공간을 거의 무료로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구요. 또 대안적인 학술 공동체들 사이의 교류, 즉 지식 공동체들의 커머닝을 활성화하는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작가님은 언제 처음 '커먼즈'를 만나게 되셨어요?


저는 1998년도에 졸업을 했는데요, 그때 한국은 IMF로 소위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이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꽤 기성세대, 혹은 주류적인 삶의 방식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특히 젊은 세대에 꽤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책에 소개한 빈집의 경우 가급적 ‘임노동'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기분으로 시작한 실험인데요. 물론,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가급적 노동하지 않고 살려면 굉장히 바빠집니다. 여러 가지를 직접 해야하죠. 왠만한 건 만들어 쓰고, 가급적 소비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생태적인 삶에 가까워지는 건 물론이고, 다큐를 찍건 밴드를 하건 아무튼 그런 것들이 굉장히 즐거웠죠. 분명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엄청나게 바쁜데 그것이 억지로 하는 노동이 아니라, 삶과 관계를 구성하는 자발적 활동이고 놀이처럼 벌어졌거든요. 함께 빈둥대며 이야기하다가, 술값이 너무 비싼데 우리가 맥주 못 만드나, 하고 누가 아이디어를 던지면 우르르 도서관에 가서 방법을 찾아보고 직접 만들기 시작한다든지.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씩 어떤 삶의 공통의 기반과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빈집 친구들은 아마 2010년쯤에 빈집은 공유재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때는 커먼즈라는 개념도 공유지라는 개념도 한국에는 회자되지 않았을 때니까, 정말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감각인 거였죠. 빈집이란 함께 하는 활동들이 만들어내는 공통의 기반과 관계이고 모두가 함께 엮어가는 모두의 비빌 언덕, 혹은 기댈 언덕 같은 거라는 기분이요. 근데, 그 무렵 저는 우연히 일본의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그룹을 알게 되었고, 거기서도 샐러리맨이 되고 싶지 않은 백수들이 되게 비슷한 걸 하고 있더라고요. 임노동에서 가급적 벗어나고자 한다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커먼즈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제가 임노동을 가능한 한 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발명하는, 혹은 구성하는 삶의 방식을 커먼즈라는 개념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입니다.


- 책은 이러한 분류의 사회과학서 중에서는 다소 예외적으로 존댓말로 쓰였어요. 이유가 있을까요?


처음에 책을 제안해주신 것이 빨간소금 임중혁 대표님인데요, 커먼즈에 대한 입문서를 만들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커먼즈라는 말이 여기저기 나오고 또 학술장에서는 많이 쓰이고 있고, 대표님 본인이 여러 경로로 관심을 갖고 접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그러니까 좀 더 손에 잡히게 커먼즈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입문서가 있으면 좋겠다고요.


사실 커먼즈는 커먼즈라는 개념이 학술장에서 어떻게 조명되고 회자되는가, 혹은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어떻게 주목되고 심지어 관공서가 활용하는가와 무관하게 언제나 존재해온 인간의 공통적 관계이자 삶의 기반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삶 속에서 극단적으로 축소되고 왜곡된 것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몸으로, 감각적으로 알고 있지만 근대의 삶 속에서 특히 언어 속에서 지워졌던 것을 보다 친근하게, 쉽게, 잘 설명하고 전달하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고민을 했어요. 친근한 입말로 쓰는게 어떠냐는 제안을 먼저 해주신 것은 빨간소금 대표님입니다.


또, 이 책을 담당해주신 담당 편집자이신 나경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조금 딱딱하고 여렵게 느껴지는 부분을 잘 집어내어 제게 다시 질문을 해주셨거든요. 이 부분이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라던가 사례가 궁금합니다 라던가 정말로 커먼즈를 처음 접하는 독자의 시각으로 길잡이를 해주신거죠. 덕분에 학술서와 대중서의 사이를 커머닝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만드는 작업이 된 것 같습니다.


- 한국은 많은 이들이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에 젖어있는 이들이 커머너가 되기 위해 어떤 작업이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참 어려운 문제죠. 저희집은 어려서부터 가난해서, 아,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지오디 노래가 생각나는데, 아무튼 초등학교 때 이사를 엄청 많이 다녔어요. 제가 다닌 초등학교가 일곱 개. 뭐, 지하방 월세방 이런거를 전전하고. 근데 그땐 잘 몰랐지만 그때부터 어머니가 계속 아주 조금이라도 돈을 모으면 부동산 투자를 하려고 노력하신 거 같아요. 그게 계속 실패하고, 한 번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데 엄마가 며칠이나 어딘가에 전화하고 울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아마 사기 같은거 당한 적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아무튼 그게 계속 계속 실패하면서 점점 더 집착같은게 생기셨어요. 지금도 부동산 투자 관련한 유튜브 같은걸 보시고 그래서 아무튼 되게 곤란하달까, 속상합니다.


제가 아무리 그만하라고 해도 그만두지 않으실 거 같아요. 어떻게든 너희한테 뭐라도 조금 남겨주고 가고 싶다, 이런 애매한 책임감과도 연결이 된 모양이라. 아무튼 이건 한국사회의 경제성장이 부동산 투기를 근간으로 하는 급격한 투기적 도시화 과정과 함께 일어난 맥락이랑 분명히 관계가 있는 거고요, 그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체적 관계가 깨지고 어떻게든 핵가족을 단위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감각이 투자의 욕망을 더 부채질하고, 그렇게 일종의 폐쇄회로 같은게 만들어진 거 아닐까 싶은데요.


근데, 또 보면 저희 어머니가 진짜 손이 크고, 사람들에게 뭔가 해주는걸 좋아하는 분이거든요. 잘 모르는 사람들, 어쩌다 오신 수리기사님들에게도 꼭 뭔가 마실 거나 간식을 접대하는 걸 보고 자랐고, 좀 손해보더라도 맘이 편한 걸 선호하시고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거죠. 우선, 사람들이 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건 결국 우리가 그런 사회를 만들어 왔다는 의미잖아요. 그게 너무 좋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도 말이에요. 게다가 돈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조차, 일상생활에서 무언가를 할때 동기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그 다양한 동기들 중 어떤 회로가 사회적으로 강하게 구축되고 활성화되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IMF 이전에 대학을 다녔는데, 그때는 학점에 엄청나게 신경쓰거나 자격증을 따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같이 철학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한다거나 하는 문화가 있었죠. 그때 엄청난 공부를 한 건 아닌데, 오히려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고, 또 같이 토론하고 싸우고 뭔가 만들고 하며 일종의 대안적 분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러한 대안적 관계의 힘이나 즐거움을 감각할 수 있는 기회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합니다.


- 자칫 커먼즈라는 개념이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의 인류가 더 살기 좋았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점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겠어요?


인류가 수렵/채집을 하던 작은 단위의 부족사회에서 농경을 통해 정착하며 계급이 생기고, 그것이 근대사회로 발전해왔다는 선적인 역사관 자체가 근대적 인식론의 산물입니다. 최근의 고고학적 자료들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굉장히 다양한 사회의 형태를 구성해왔을 뿐 아니라 위계를 만들지 않고 수평적인 대규모의 문명들이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제가 인류학적 사례들을 통해 커먼즈를 이야기한 것은 과거의 사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인식론적 지도를 넓게 펴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이러하다, 인간 사회는 이렇게 발달해 왔다, 라는 것이 굉장히 도그마적인 근대적 인식론의 산물이라는 것이죠.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책인데,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고고학자인 데이비드 웽그로우와 함께 쓴 유작인 <모든 것의 새벽>이라는 책이 꽤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에게 원래 이러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다양한 정치체들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놀라울만큼 실험적인 정치사회체의 사례들이 있습니다. 한 계절에만 필요에 의해 권위주의적 국가를 만들었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위계적 국가와 경찰력을 싹 해체하고 완벽하게 평등한 사회로 돌아가는 꽤 방대한 규모의 사회들에 대한 사례도 여럿 보고됩니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도시문명의 사례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오히려 질문은 왜 우리는 대규모 사회는 지금과 같은 형식(정치는 위에서 하고, 빈부격차가 고착화된 권력이 되는 사회의 형식)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라는 것이죠. 저자들은 현대 국가의 기원이 사실 진화가 아닌 전쟁과 식민지 폭력에 기반한다고 주장합니다.


커먼즈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은 과거가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삶과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고요. 도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활기를 띠고, 서로 다른 문화가 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며 커먼즈로 만들어집니다. 인터넷과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사람들은 전세계적으로 연결되고 접속하며 새로운 가치를 생산합니다. 문제는 커먼즈로 생산된 가치들은 집세나 금융이자의 형식으로 계속해서 종획되고 사유화된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커먼즈를 이야기하는 것은 토지와 같은 전통적 생산수단 뿐 아니라 도시와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생산수단을 어떻게 커먼즈로서 함께 향유할지 고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한국에서 커먼즈의 가능성이라는 건 피었다가 지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앞으로 한국 사회에 커머너가 늘어나고 커머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계세요?


음, 조금 긴 안목으로 본다면 사실 피었다가 진 것은 임금노동, 즉 우리 노동을 포함한 모든 것을 상품의 형식으로 교환하는 것을 통해 삶을 재생산할 수 있다고 보았던 근대의 기획이 아닐까요? 생산력은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하는데 빈부격차와 가난은 심해지고, 사람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생계가 곤란한데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불쉿잡'이라고 부른 쓰레기같은 일자리는 넘쳐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노동이 아닌 방식으로 삶을 생산하고 지속하는 방식을 새롭게 구상하는것은 너무 중요한 과제 아닐까요.


커먼즈는 우리가 그 단어를 쓰건 쓰지 않건, 그러한 개념이 없던 때에도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와 공동체의 기반이고 언제나 거기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수 없으며 그러므로 공통의 삶의 단위인 공동체, 혹은 사회를 만듭니다. 이는 결국 어떻게 노동, 즉 생산을 조직하고 나눔으로써 아이를 낳고 기르고 늙고 죽는가, 즉 삶과 죽음을 관장할 것인가의 문제죠.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주목받은 것은 IMF 이후입니다만, 사실 사회적 경제는 커먼즈적 경제를 복구하고자하는 시도의 하나라고 해도 좋을텐데요, 이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은 전통적 공동체가 폭력적으로 그리고 아주 급격히 해체된 산업화시기,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와 알몸뚱이 노동자가 된 도시빈민의 판자촌에서 이미 나타났습니다. 즉, 커먼즈는 사람들이 (임노동에 완전히 의존할 수 없는 이상)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그리고 임노동이라는 특수한 생산양식 밖에서) 언제나 만들어지는, 내생적인 살림살이의 양식입니다.


현재의 기후위기는 우리 삶의 기반인 지구를 연료로 삼아서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많은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현재의 삶의 방식, 각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각자도생하고 삶의 유일한 공통단위는 이성애적 핵가족이라는 삶의 방식이 삶을 너무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들면서, 사회의 재생산 자체가 실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왜 우리는 이렇게 이상한 삶을 지속하고 있을까,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학원을 뺑뺑이 돌고, 자신을 비싼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온 젊음을 바치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삶은 전쟁터라고 여기는 세계의 룰을 벗어나서, 친구들과 함께 다른 삶을 기획하는 것. 누군가 정한 기준을 벗어나 우리 삶을 스스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커머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임노동과 핵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커먼즈를 구성할 시급한 조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방식의 전체주의 사회로, 혹은 폐쇄적이거나 자족적인 공동체로 될지 우리가 보다 넓고 수평적인 방식으로 삶을 재조직하는 실험을 할 수 있을지는 중요한 차이를 만들 것입니다.


- 보통은 '중세'를 '암흑 시대'로 부르면서 안 좋았던 때로 인식하고는 하는데, 책에서 '마녀사냥'에 대한 전복적인 해석과 중세 시대의 커머닝을 언급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원시수렵사회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듯이 중세에 대한 이미지 또한 근대화 과정 속에서 재구성된 것에 가깝습니다. 조선사회가 엄청나게 유교적 도덕으로 사람들을 성적으로 억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후기의 사설시조나 춘향전 같은 것만 해도 지금으로 치자면 청소년에 해당하는 주인공들에 엄청나게 파격적인 성묘사가 나오잖아요. 고려시대에 남녀 지위는 크게 다르지 않았고, 민중들은 결혼이나 이혼에 부담이 없이 가볍게 만나고 헤어졌다고 합니다. 성이 억압되었다고 알려진 조선시대조차 지배층에서나 그렇지 민중의 성문화는 대단히 개방적이었다고 해요.


유럽의 경우에도 중세의 미시사는 민중의 삶이 얼마나 왕이나 지배계급의 도덕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는지 나옵니다. 사실 보통의 사람들에게 국가는 거의 감각되지 않는 것이었죠. 위계적 통치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훨씬 헐겁고 그 사이의 자율공간이 많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언제 일하고, 쉴지 스스로 통치했고, 축제와 쉼은 일상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들의 노동, 결혼, 집, 가족, 성, 자신의 삶에 대한 통치를 둘러싼 이 모든 감각을 바꾸는데는 어마어마한 폭력이 필요했습니다. 공유지의 인클로저는 축제와 모든 즐거움을 금지한 종교개혁, 여성을 집안에 가두는 마녀사냥, 쉼과 여유, 상호의존의 감각을 구걸과 범죄로 취급한 감옥과 시설 등과 함께 진행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집 근처 공원인 서울혁신파크 개발 반대 운동에 연대하고 있는데요. 그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점점 공공이나 공유라는 개념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작가님도 그런 무력감을 느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를 어떻게 딛고 책을 쓰셨는지 그 과정이 궁금했습니다.


저는 책에 1970년대 도시빈민 여성들이 만든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당시 운동에 참여한 분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들의 이야기에는 사실 ‘커먼즈’라는 단어도, ‘공공'이라거나 ‘공유'라는 단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개념으로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보다 훨씬 두터운 공유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요.


아무튼 지금 도시운동에서 ‘공공'이나 ‘공유'는 계속해서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합니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 속에서 공유의 감각이 심각하게 축소되면서 사회 재생산 자체가 위기를 겪고 있고,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새롭게 구성되고 있는거 아닐까 해요. 즉, 사회의 변화 속에서 다시 새로운 운동이 구성되고 있는거죠. 그런 의미에서 70년대의 (커먼즈라는 단어 없이 전개된) 커먼즈 운동이 다른 방식으로 변주될 가능성, 우리가 예측하거나 상상하지 못한 운동의 주인공들이 만들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자본주의나 상품화의 문제, 토지나 공공성을 둘러싼 문제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 혼자 살길 선택하거나, 가능한 한 빨리 은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등 이전 세대와 굉장히 다른 욕망을 만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삶의 방식에 대한 불만들이 드러나는 하나의 징후가 아닐까요. 이것이 점점 더 심한 개인주의와, 투자하는 주체들의 각자도생으로 가는가, 혹은 완전 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는가가 중요할텐데, 이때 커먼즈는 여성과 소수자, 비인간까지 포함해 우리를 지구의 일부로 되돌리고 함께 하는 감각을 되찾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어쨌건,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가능하면 즐겁게, 잘, 살아가고 싶잖아요. 그런 면에서 1970년대 도시빈민 여성들의 운동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이 극단적으로 불안정하고 고달픈 삶 속에서도, 그 운동을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상황만 두고 본다면 지금이랑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도시빈민 여성들이 함께 교류하고 커먼즈를 만드는 것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커먼즈란 결국 어떤 억압이나 규정성도 초과하는 삶의 생명력 그 자체라고도 할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분이 있고 그것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 서울혁신파크는, 그리고 (비슷하게 위기에 처한) 서달산숲속도서관은 어떻게 위기를 돌파해나갈 수 있을까요?


서달산숲속도서관은 주민들이 시작한 커머닝의 사례이고, 서울혁신파크는 관에서 시민들에게 공공공간을 열어주면서 시작된 사례이지만 둘 다 관의 태도에 의해 위기에 처했다는 점에서 이 두가지 사례는 책에서도 소개했던 경의선공유지의 사례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공공이라는 것이, 몇몇 공무원이나 관료들의 의지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시민들과 괴리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이탈리아에서는 물민영화에 유권자의 90% 이상이 반대하면서 커먼즈가 정치적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또, 1700년대에 세워진 로마의 아주 유명한 극장이 있는데요, 이게 민영화될 계획이었는데 여러 예술가와 시민들이 이 민영화계획을 막기 위해 건물을 점거합니다. 법적으로 이 극장은 국공유물이었기 때문에, 시의회가 민간투자자를 유치할 수 있었는데요, (한국의 경의선공유지처럼요) 이를 점거한 시민과 예술가들은 이 건물을 커먼즈로 인정받고 재구축하기 위해 3년간 시위를 지속했습니다. 개인 소유물인 사유지와 국가가 관리하는 국공유지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커먼즈라는 새로운 영역을 인정하라고 하고 이를 자치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커머너들의 재단을 설립합니다.


결국 시와 극적으로 협상에 타결해서 재단과 시가 이 극장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방식이 구성되었고, 극장은 향후 민영화입찰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물론 이 사례를 한국에 곧장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투쟁이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는 얼마나 광범위한 지지를 얻느냐에 달려있으니까요. 경의선공유지 부지가 그랬듯이, 서울혁신파크의 경우에도 이 공간을 상업적으로 원하길 바라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발이 아파트 가격을 올려줄거라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있는 거죠. 즉, 커먼즈가 이러한 위기들을 돌파한다는 것은 우리가 집값이 아닌 다른 가치, 삶의 질과 함께 하는 사회에 대한 가치를 추구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최근 여당에서 도서관을 없앤 뒤에 선거철이 다가오니 스터디카페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어서 비판을 받고 있는 후보가 있어요. 인터뷰 하러 오는 길에 문득 '이건 정말 커먼즈에 (나쁜 방향에서) 좋은 사례'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한국에서 12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다가 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서른이 넘어서 캐나다 밴쿠버에 가서 석사 과정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정말 충격이라고 해야 할까? 밴쿠버에 굉장히 큰 공공도서관이 있고요, 제가 자주 갔던 곳은 학교 도서관인데 어느 쪽이든 아무나 들어가서 도서관을 쓸 수 있는데 노숙자인 분들도 굉장히 많아요. 그러니까 도서관에 누구나 와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는 분들이 많고 짐이 없어질 수도 있으니 '짐 관리를 잘 하라'는 경고문까지 있었어요. 중요한 것은 도서관이 열려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감각이예요. 자잘한 위험을 함께 감수하면서도 그 감각을 지키는게 커머닝이죠. 한국 대학 도서관은 대학생이나 교직원이 아니면 못 들어가게 하잖아요.


또 하나, 그곳의 도서관은 어느 정도 잡음이 있는 것이 당연한 공간인 거예요. 장애인 분들이 활동지원사랑 같이 도서관에 오는데 아아, 하는 소리를 내는 분들도 계셨어요. 어느 정도 소리가 나는 건 당연하고 대화를 하거나 작업을 하는 것도 당연해요. 대학 도서관이라고 하면 한국은 조용해야 한다는, 저는 이것이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감각이 달라서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고시 공부'만이 진짜 공부이기 때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안 되고 노트북 사용은 다른 공간에서 해야 하죠. 그러니 도서관을 없애고 스터디카페를 만든다는 건 뭐랄까요, 그런 걸 관에서 추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행한 일인 거죠.


- 마지막 질문이에요. '커먼즈란 무엇인가' 책 이후에 어떤 활동이나 연구를 계획하고 계신지가 궁금합니다.


요즘 도시 커먼즈(urban commons)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이걸 시골과 다른 도시에서의 커먼즈로 이해하기 쉽거든요. 저는 이걸 도시적 커먼즈라고 부르고 싶어요. 도시라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와 부딪치고 함께 만드는 커먼즈라는 의미에서요. 예를 들어 지금 시골엔 이주노동자나 이주민이 엄청 많고, 문화적으로 섞이고 있죠. 시골이나 도시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모든 곳들이 접속하고 연결하고 충돌하는 일이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커먼즈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는 과거와 같은 작은 규모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과는 너무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한편,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이 강제되는 도시에서는 서로를 분리하는 '빗장 커뮤니티'(아파트 출입 제한 등) 같은 게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전통적 의미의 공동체도 빗장 커뮤니티도 아닌 지금 여기서 구성되는 커먼즈란 어떤 형식일까, 이를 '도시적 커먼즈'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싶어요.


또 하나는, 저는 원래 숫자를 싫어하고 경제학을 너무너무 싫어하는 사람이고 계산도 못 하는데 금융을 통해 커먼즈를 보고자합니다. 금융이란 사실 돈의 문제라든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남거나 모자라는 자원을 어떻게 이동시키고 나누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인류학적인 이야기랑도 연결되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금융을 조직하느냐는 어떤 공동체, 혹은 사회를 만드는가, 어떤 인간들을 만드는가와 연결되어 있었던 거 같아요. 이를 테면 '반반 결혼'이라는 현상은 특정한 형태의 금융이 어떻게 결혼, 혹은 가족을 둘러싼 우리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죠. 즉 금융을 바꾸는 것이 커먼즈의 핵심적인 활동이라는 생각이 있고, 그런 차원에서 후속 연구를 진행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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