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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tta Jan 19. 2016

오늘의 소소 도피

당신을 녹여 줄 Self therapy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도서관에 가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오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며 나왔는데, 막상 집을 박차고 나오니 코가 금세 새빨개질 만큼 너무 추웠다. 아, 이런 날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책을 읽어야겠다 싶어 발길을 돌렸다. 케이블 채널에서 새벽에 틀어준 색, 계를 본 이름 모를 그날 밤 이후 내 뮤직 리스트에는 그 영화에 나온 피아노 곡들로 가득 찼다. 특히 Falling rain과 Dinner waltz에 꽂혀 반복 재생으로 설정하여 하루 종일 들었다. 물론 눈이 펑펑 내렸던 오늘도 예외 없이 비극으로 끝난 두 남녀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두 곡을 들으며 카페로 향했다. 타박타박, 이미 제각각의 발자국이 찍힌 눈 위로 나의 흔적을 남기며 가고 있는데 눈 앞에 카페보다 더 흥미로운 가게를 발견했다. 없는 게 없다는 커다란 문구 센터. 기대하고 기대하던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순간처럼 순간 들뜬 마음에 오늘의 계획을 무시한 채 나는 문구 센터로 들어갔다. 어릴 적 나의 백화점이었던 이 곳은 여전히 다양한 종류의 문구 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그렇게 엄마한테 졸랐던 스티커와 요술봉은 여전했고 (더 세련되게 변했다!) 한 켠에는 새해 인사 카드로 가득 차 있었다. 딱히 필요한 것이 없어  두리번두리번 대는데 그때 눈에 띈 색연필. 예쁘게 깎여있는 색연필 한 다스와 내  한쪽 팔 길이만 한 종이 두장을 사들고 추억의 백화점을 나왔다. 아무런 이유 없이 충동적으로 산 문구 용품을 들고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가 가장 좋아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나오고 나는 까슬까슬한 그 종이를 넓게 펼쳤다. 슥슥슥-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와 영어 회화에만 몰두했던 휴학생 시절에도 나의 취미 활동은 죽지 않았다. 섹시한 제빵녀가 되겠다며 주방을 밀가루와 초콜릿으로 뒤엎었던 그 시절, 나름 귀여운 봉투를 사와 매듭지어 주변에 선물하곤 했다. 어설픈 모양에 딱딱하기만 한 그 쿠키를 다들 맛있게 먹어주었고 나는 창작과 기다림의 베이킹이 주는 행복을 한가득 느꼈다. 그러나 잠시 한국을 떠나면서 이 취미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다시 복학을 하고 학업과 운동 외 내가 잘 모르는 색다른 활동을 하며 재미를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집 앞 기타 가게로 갔고 통기타 기초반 3개월을 등록했다. 나도 등 뒤로 기타 가방을 메고 다니는 여자라는 우스운 자부심에 더 열심히 다녔다. 바르자마자 벗겨지는 매니큐어 그리고 퉁퉁 붓고 까지는 손가락들, 가장 큰 장벽은 자유롭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타를 향한 나의 화력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난 다음 수강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다음은  켈리그라피에 몰두했고 함께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전달했다. 나의 휘갈김이 동지들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며. 이 또한 곧 식어버렸고 지금은 드로잉이라고 부르고 싶은 낙서를 즐겨하고 있다.


도피형 취미랄까, 억지로 외워야 하는 토익 단어나 하루 종일 들어도 잘 들리지 않는 중국어 듣기 문제에 싫증이 난 나에게 무엇인가 신선함이 필요했다. 할 것은 많으나 심심한 나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잠시  한눈팔아도 되는 소소한 도피를 나는 원했다. 그래서 한동안 열렬히 사랑했던 지난 취미들, 나는 이 활동을 Self-Therapy라고 부르고 있다.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나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집중하고 연습하다 보니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그 순간에는 못난 자존심도 온갖 나의 걱정들도 잊어버리고 어설픈 손으로  하나하나씩 기워나갔다. 이전에 시도했던 전자파 단식, 그게 나도 모르게 시작된 것이다. 물론 틈새 시간을 활용하기에 휴대폰을 하루 종일 안보는 것은 아니 지만 색연필로 그려나가는 그 고요의 시간에 더 이상 나를 재촉하고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불어 나의 딴짓은 나 혼자만의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잘 포장해서 내 마음도 조심스레 담아 건네다 보니 상대도 나도 모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함께 마주 보고 밥을 먹는 나의 모든 주변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건넸다. 그들은 딱 나다운 선물이라며 걱정했던 나를 쓰다듬어주었고 나는 더 큰 기쁨을 되돌려 받았다. 



중국어로 취미는 愛好(Aihao)라고 말한다. 본인이 좋아하는 일, 아끼고 사랑하는 것, 친근한 활동 이 모든 것을 포함한 단어이다. 좋아서 하는 활동들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러준다. 순간의 몰두는 나만의 우주를 만들고 삭막한 미지의 세계를 잊도록 도와준다. 그 우주에서 어느 누구의 지배 없이 나는 직접 오감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고 적고 그려나간다. 아 가련하고 외로울 줄만 알았던 일상에 내가 온전히 녹일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든다. 그렇게 소소한 도피는 엉망진창이었던 나를 좀 더 올곧게 그리고 깊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 나의 충동에도 어떠한 비난 없이 그렇게


나는 요즘 그림을 즐겨 그린다. 

아무런 계획 없이 아무런 스케치 없이, 흰 종이 위에 내 마음껏 손을 뻗어 그려나가는 것만큼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없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보호하고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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