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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tta Sep 17. 2016

우리의 낯선 추석

할매의 빈자리

길다면 긴 이번 추석 연휴가 다 지나간다. 

휴대폰을 뒤적거리다 보니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연휴를 보내고 있는 듯, 혼자 집을 지키는 이도 비행기를 타는 이도 적지 않게 보인다. 올해는 유달리 새로운 추석을 맞이했다. 원숭이 해에 딱 맞게 나는 졸업을 했고 5개월간의 짧은 인턴 생활을 마쳤다. 지난주 갓 귀국해서 난장판인 방을 내버려 두고 3시간 차를 타고 시골에 갔다. 겨울에 보고 가을의 도입에 다시 찾은 시골에는 주름이 더는 할아버지뿐이었다. 순간 잊고 있었다. 그래, 할매는 없지.

 




올해 초, 눈이 내리다 말다 하던 그 추운 1월 끝자락에 나의 할매는 세상 놀이를 마무리하고 하늘에 가셨다.

나의 고집불통 할매는 전형적인 한국 할머니이자 어머니이자 시어머니셨다. 그녀는 세 남매를 키우기 위해 만두집을 하셨고 자식들이 다 크자 그간 잘 버텨주었던 두 다리에 문제가 생겨 다시 대지로 돌아가기 전까지 쭉 앉은뱅이 생활을 했다.  똥그란 눈을 굴리던 내가 할매를 보고 느끼고 할매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때부터 그녀는 늘 뜨신 아랫목에 앉아 계셨다. 두 다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어공주처럼 늘 앉아계셨다. 제한된 동선에서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자기 영역을 지켰고 그런 할매의 삶이 나는 참 고달프고 안타까웠다.


그녀의 슬픔은 욕심으로 표출됐고 이는 나의 부모님께 큰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솔직히 부담일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효도'라는 명목하게 나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를 위해 부단히도 정성과 충성을 다했다. 물론 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 그 와중에 나는 나름 큰 손녀라고 이쁨을 받았었다. 아버지가 몰래 건넨 용돈이 다시 내 주머니로 돌아왔고, 일 년에 서너 번 딱 그 정도로만 찾아가는 어린 손녀에게 할매는 늘 눈물의 작별인사를 보냈다. 언제 너를 또 볼꼬


해가 바뀌기 전, 눈이 풀려버린 할매를 만났다. 

자꾸 내가 모르는 곳에 가고 싶다고 데려달라고 웅얼대던 할매. 후에 들으니 그곳은 약 40년 넘게 가지 못했던 그녀의 고향이라고 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할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 마음이 아팠다. 아프고 이 글을 적어 내려 가는 순간도 마음이 아리다. 

할매를 미워한 적도 많다. 왜! 도대체 왜! 그리 욕심을 부리고 가족을 힘들게 하는지, 그 옛날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우리에게 강요했는지. 그렇게 말 많고 억센 할매는 뭐가 그리 급하다고 말 한마디 없이 급작스레 날아가셨다. 더 이상 욕심도 없고 미련도 없다는 듯이


찬바람 불던 그 날 아침, 휴대폰 넘어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무섭게도 떨렸다. 

나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세상의 순리라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마주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남은 가족들을 어린아이로 되돌려버렸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엉엉 울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고모와 아버지, 지난 이십여 년간 나의 가장 큰 사람이 오열하는 모습이 낯설고도 낯설었다. 남은 사람이 더 힘들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는 나에게 이제껏 키워주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검은 카라를 다시 여미는 아빠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할매를 미워하던 나의 못된 마음에 할매가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가버린 것 같아 나는 한동안 죄책감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쓸쓸했다. 

묶인 다리를 가진 할매의 빈자리는 지독하게도 컸다. 하나하나 잔소리하는 사람 없네 하고 농을 쳤지만 텅 빈 안방에 할매가 좋아하는 일일 드라마만 울리니 우리는 더 이상 농을 칠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눈빛이 흐려졌다. 

다 자란 손톱과 발톱을 깎지도 않은 채 그는 담배만 줄곧 피웠다. 생전 할매 병시중만 하던 할아버지는 우리가 집에 돌아간다고 하니까 훌쩍이셨다. 또 언제 볼꼬 하고.

낯설고 슬펐던 추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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