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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18. 2019

찬양팀, 어설픈 마침표

'82년생 김지영' 85쪽 - 3번째 이야기

부모님 집에서 살면서,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되고, 일주일에 네 시간만 어머니가 구해 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지영씨의 대학 생활은 무척 윤택한 편이었다. 성적은 안 좋았지만 전공 공부는 재밌었고, 아직 구체적으로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떠오르는 바가 없어서 취업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과내 학회와 여러 교내 동아리에도 폭넓게 기웃거렸다. 동전을 넣으면 곧바로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식의 성과는 없었지만 그 활동들이 전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생각할 기회가 없고, 의견이 없고, 늘 말도 없어서 스스로를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던 김지영씨는 자신이 의외로 사람들을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하고, 남 앞에 드러나는 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85-86쪽)


김동진씨는 모태신앙이었다. 즉,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는 의미다. 김동진씨의 가족이 출석하던 압구정동의 대형 교회는 대학부 인원이 많았고, 부서도 여러 개로 조직적으로 잘 나뉘어 있었다. 학과 행사나 동아리 행사에는 도대체 몇 시에 들어오는지 눈에 불을 켜고 지키던 엄마는, 토요일 저녁에 끝나서 같은 조원들끼리 밥 먹고 차 마시다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에는 비난하며 화를 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기도 하고, 김동진씨의 마음 한 구석엔 언젠가는 교회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렇기도 했다. 대학 2학년때부터 김동진씨는 동아리에도 안 나가고 학과 행사도 별로 많이 나가지 않으면서 교회로 향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색할 것 같아서, 김동진씨는 여러 개의 부서 중 아는 친구가 있는 예배부에 들어갔다. 예배에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여 자리를 안내해주고 주보를 나눠주는 등의 일을 하는 부서였다. 그러느라 늘 예배 전에 하는 찬양 시간에는 예배실 밖에서 일하기 바빴지만, 예배당 안에서 들려오는 찬양 소리에 항상 귀가 솔깃했고, 늘 뭔가 나만 빼고 저 안에서 대단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던 차에, 학년도 바뀌고 하면서 그 틈을 타서 찬양팀으로 옮겨갔다.


김동진씨보다 두 살 위이고, 재수해서 대학에 들어가서 김동진씨보다 1년 먼저 같은 교회 대학부에 출석하고 있던 오빠 김욱진씨 역시 찬양팀이었다. 김동진씨는 잠시 오빠가 몸담던 곳이라 하지 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찬양을 하고 싶어서 찬양팀에 가입했다. 남매는 용감했다느니 하는 농담을 들어가며 대학부 생활을 한 김동진씨가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오빠랑 정말 똑같이 생겼다'였다. 그런데 함께 있을 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김욱진씨는 그 말을 한 상대에게 정색하고 때로 불같이 화를 냈다. 김동진씨는 그 말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지만, 오빠가 그렇게 화를 내니 기분이 나빠져서 때로 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김욱진 김동진씨 남매는 '정말 똑같이 생겼는데, 똑같이 생겼다고 얘기하면 화내는' 남매가 되었다.


김동진씨는 대학 2학년, 3학년을 모두 찬양팀에서 보냈다. 리더 학년이 되는 3학년때는 어쩌다가 반주자가 되었다.  학년 선배들, 동기들,  학년 후배들과 함께 2년간 신나게 찬양팀 생활을 하며 김동진씨는  이후의 삶의 기반이 되었던 신앙을 다져나가게 되었다. 물론 엄마는  통금을 정해주었고, 김동진씨가 눈치보며 조금조금씩 귀가시간을 늘려가면 못이긴  하고 내버려 두다가도 어느 순간 불같이 화내며 다시 7 통금을 정하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덕분에 어떤 때는 모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1시간쯤 걸리는 집까지 그야말로 뛰어가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밤늦게까지 여자남자 섞여서 이런저런 일 하다가 결국 "문란해지는" 연극 동아리가 아니어서 그런지, 김동진씨 엄마의 통제는 학회 활동이나 동아리 활동 때와는 달리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고 김동진씨는 생각했다.


그 때 그 찬양팀 친구들을 오늘 만나고 왔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그 친구들은 각자 결혼하고 아이 키우며 사는 동안 연락이 거의 단절되었다가, 우연한 계기로 몇 년 전 다시 모였다. 다시 모인 찬양팀 친구들은 전부다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애기엄마가 되어 있었다. 잠깐 모여서 세 시간쯤 떠들고서, 우리 아직 얘기를 시작도 안 했는데 헤어지기 너무 아쉽다며 헤어지고 돌아왔다.


다시 만난 찬양팀 친구들은 나의 엄마가 괴팍한 정신병자 수준의 사람이었던 걸 이제는 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친구들 중에 두 명이나 더, 나의 엄마와 비슷한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모두 그 때는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서로에게 하지 못했다. 다만 서로의 기도와 찬양과 눈물을 보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런 엄마 이야기까지 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안다. 물론 모든 것을 전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런 엄마 때문에 너무도 힘들었던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은 안다. 나에게 지금 그런 친구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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