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85쪽 - 2번째 이야기
부모님 집에서 살면서,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되고, 일주일에 네 시간만 어머니가 구해 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지영씨의 대학 생활은 무척 윤택한 편이었다. 성적은 안 좋았지만 전공 공부는 재밌었고, 아직 구체적으로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떠오르는 바가 없어서 취업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과내 학회와 여러 교내 동아리에도 폭넓게 기웃거렸다. 동전을 넣으면 곧바로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식의 성과는 없었지만 그 활동들이 전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생각할 기회가 없고, 의견이 없고, 늘 말도 없어서 스스로를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던 김지영씨는 자신이 의외로 사람들을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하고, 남 앞에 드러나는 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85-86쪽)
엄마가 싫어하지 않을만하면서도 김동진씨 자신의 취향에도 좀 맞을만한 동아리가 뭐가 있을까 하고 궁리끝에 생각난 것은 합창 동아리였다. 영어회화 동아리도 후보에 올랐으나, 너무 공부하는 느낌이라 시들해져 버렸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지겹도록 했던 공부였다. 아무리 영어를 좋아하는 김동진씨라도 신입생이던 첫 학기에 영어회화 동아리에 가입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김동진씨는 이미 교내 어학원에서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던 터였다. 엄마는 순순히 합창동아리는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 때 당시로서는 드물고 특이하게, 1학년 2학기에 '2학기 단원'이라는 이름으로 교내 합창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었다.
김동진씨는 본인이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고 재미있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틴어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언어를 외워서 불러야 하는 합창곡을 외우는 것도 좋아했다. 학교에 오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악보를 펴들고 가사를 외우기도 했다. 지휘자는 작곡과의 남자 복학생 선배였는데, 그 많은 단원들을 쥐락펴락하며 지휘를 잘 했고, 어설픈 음정들을 정확하게 이끌어낼 뿐 아니라 하나의 곡을 만들어나가는 일을 잘 해서, 김동진씨는 속으로 감탄하곤 했다.
남들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던 김동진씨는 거의 100명 가까이 되는 그 많은 단원들과 모두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으나, 같은 알토 파트인 여자아이들 몇몇과는 꽤 친하게 지냈다. 그 중에는 김동진씨의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들도 2명 있었다. 우연찮게 동아리에 가서 만난 사이였다. 합창동아리는 공연을 위해 한동안 맹연습을 했고, 학내 문화관에서 합창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이틀간의 무대였다. 하루는 공연 후 바로 헤어졌지만, 이틀째이자 마지막날의 공연 후에는 밤새워 노는 거한 뒤풀이가 있다고 했다. 학교 근처의 호프집을 하나 잡아서 통째로 빌리고, 집에 안 가고 밤새 논다고 했다. 김동진씨는 너무도 가고 싶은 마음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김동진씨에게 집에 올 시간을 제시하면 술집 앞으로 차를 몰고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새벽 2시에 학교 근처 유흥가 앞으로 김동진씨를 데리러 왔다. 재미있는 것은 김동진씨의 엄마가 데리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동진씨의 고등학교 동창들 2명도 함께 집에 가고 싶어해서 김동진씨의 엄마는 그 2명도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김동진씨는 노래하는 합창 동아리가 좋았다. 아마도 노래를, 음악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고서 얼마 후 단장인 남자 선배네 집에서 1박2일 약식 엠티같은 것을 한다고 했다. 집이 반포(고속터미널 앞)의 한 아파트인데, 그 날 부모님이 여행가시기 때문에 집이 빈다고 했다. 김동진씨는 또 너무 가고싶어서 무서움을 무릅쓰고 이번에도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이번에도 공연 때와 같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서, 집에 돌아올 시간을 제시하면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이번 엠티는 공연 후 뒤풀이보다는 훨씬 소규모였다. 합창 동아리니까 그냥 술만 마시는 엠티는 아니고, 각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가져와서 같이 듣고 왜 그 노래가 좋은지 이야기하는 테마가 있는 엠티였다. 테이프로 노래를 듣던 시절, 김동진씨는 권진원의 '살다 보면'을 가지고 갔다. 다른 사람들이 가져온 노래들은 다양했다. 김동진씨는 비록 성격이 엄청 활달하고 말이 많고 그 자리의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하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지만, 구석에서 조용히 다른 사람들의 노래와 이야기를 듣는 것과 때로 아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은 잠도 안 자고 계속 놀았다. 노래 이야기가 끝난 후 삼삼오오 흩어져서 방에서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어딘가에서 계속 얘기를 하거나 했다. 그리고 김동진씨는 이번에도 새벽 2시인지 3시인지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자지 않고 신나게 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라했다. 김동진씨는 엄마가 바깥에 데리러 와있어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 날 이후로 김동진씨는 더 이상 합창 동아리에 적극적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그 때가 쪽팔림의 마지노선이었을 수도 있다. 김동진씨는 다 큰 성인이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늘 새벽에 데리러 오는 엄마 차를 타고 가는 애로 여겨지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때마침 종강을 하고 방학에 들어가서 학교에 갈 일이 없기도 했고 해서 김동진씨는 자연스러운 것마냥 동아리에 나가지 않게 되었고, 이듬해에 2학년이 되어서도 동아리에 나가지 않았다.
이 시리즈를 쓰기 시작할 때에는 그저 단순히 책을 따라 써나가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지영씨의 엄마와 아빠 이야기가 나온 단락에서 걸렸다. 나의 엄마와 아빠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써야할까 생각을 하는데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그래서 그 부분은 피해서 김지영씨의 대학 입학 이야기로 건너뛰었다. 그런데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는 도처에 깔려있었다. 아마 독자들은 엄마가 나에게 왜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는지 이 정도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어 쓰기에는 지금의 내가 역부족인 것 같고, 그렇다고 엄마 이야기를 쏙 빼고 쓰자니 알 수 없는 이유로 무기력한 나의 모습만 쓰게 될 것 같아서 시작하기는 했지만 역시 어렵다. 얼만큼 나를 이 글에서 열어보이고 얼만큼 엄마와 아빠에 대한 분석을 해나가야 할지, 점점 더 힘들고 어려워진다. 이럴 줄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