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85쪽
부모님 집에서 살면서,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되고, 일주일에 네 시간만 어머니가 구해 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지영씨의 대학 생활은 무척 윤택한 편이었다. 성적은 안 좋았지만 전공 공부는 재밌었고, 아직 구체적으로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떠오르는 바가 없어서 취업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과내 학회와 여러 교내 동아리에도 폭넓게 기웃거렸다. 동전을 넣으면 곧바로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식의 성과는 없었지만 그 활동들이 전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생각할 기회가 없고, 의견이 없고, 늘 말도 없어서 스스로를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던 김지영씨는 자신이 의외로 사람들을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하고, 남 앞에 드러나는 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85-86쪽)
김동진씨의 등록금은 싼 편이었다. 일단 서울대는 국립대학이라 다른 사립대학에 비해 등록금이 쌌고, 그 중에서도 사범대는 장학금이 아주 많은 편이었다. 김동진씨는 스무 명 중 몇 등을 해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늘 뭔가 장학금을 받았다. 그래서 한 학기에 몇 십만원씩만 내면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김동진씨의 엄마는 흡족해하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가끔 오빠 김욱진씨에게 들어가는 엄청난 액수의 등록금과 비교하며 한숨을 지었다.
김동진씨는 뭐가 됐든 책상 앞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진득하니 열심히 공부하던 고등학교 때까지의 습관으로 공부하여, 어찌어찌해서 약간 높은 학점을 유지했다. 전공 공부는 재미없었다. 교수님들과 토론하는 학생들은 항상 정해져 있었고, 그들은 동기들 중 몇몇 남자아이들과 군대에서 제대한 복학생 선배들이었다. 김동진씨는 수업시간에 그들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앞에서 뜬구름 잡는 말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김동진씨 자신이 너무 무식한 것 같기도 해서, 교수님과 일부 학생이 토론하는 수업시간마다 무언가 주눅이 들었다.
학과공부와는 별도로, 학과 안에 학회라는 것이 있다며 선배들이 학회 활동을 하라고 했다. 뭔지도 모르겠고 어리둥절했지만 뭔가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덕에 김동진씨도 어딘가 학회에 가입을 했다. 가입하고 보니 선배들이 현대사 책을 읽어오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모든 학생들을 졸리게 만들었던 국사 선생님 이후로 김동진씨에게 한국사는 졸린 과목일 뿐이었다. 그런데 대학에서 왜 또 내가 그 졸리고 재미없는 한국사 책을 읽어야 하나 싶어서 그 모임엔 나가지 않았다. 학회 선배들과 동기들은 자꾸 김동진씨를 호출했고, 비록 책은 읽지 않았지만 그냥 모임에 나가보았다. 학회는 대체로 약간의 토론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술자리였다. 덕분에 김동진씨는 집에 늦게 들어갔고, 김동진씨의 엄마는 통금을 정했다. 김동진씨가 대학에 다니는 동안 통금시간은 바뀌기도 하고, 스르르 없어졌다 다시 생기기도 했다. 언젠가는 통금이 저녁 7시였다. 선배들과 동기들은 도대체 그런 통금으로 뭘 하냐며 김동진씨를 의아하게 또는 불쌍하다는 듯이 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동진씨는 최대한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했기에 대충 통금을 지키는 척 했다.
김동진씨의 엄마는 김동진씨가 엠티에 가는 것도 싫어했다. 한 번은 학과 엠티에 다녀와서 그냥 넓은 방 한 개에서 여자 남자 다같이 놀다가 구석에서 알아서 쓰러져 잔다는 비슷한 말을 했더니 엄마가 기겁을 했다. 아니 도대체 왜 남자 여자 방을 따로 안 쓰냐고 했다. 그 이후부터 김동진씨는 엠티도 잘 갈 수 없었다.
김동진씨는 연극 동아리에 가보고 싶었다. 해본 적은 없지만 연극을 해보고 싶었다. 왠지 잘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대학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밑그림 따위는 없었지만 다만 한 가지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예전부터 갖고 있던 터였다. 엄마가 싫어할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일단 동아리방에 가보는 용기있는 일을 감행했다. 마침 거의 방학때여서 동아리방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지금 당장 돌아가는 일도 없다고 했다. 김동진씨는 수업이 끝나고 동아리방에 2,3일쯤 출근하다시피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고, 처음 보는 애들이랑 말이나 몇 마디 하다가 오는 게 다여서 딱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연극동아리에서는 방학에 워크샵이 있다고 했다. 다같이 어딘가에 가서 연극도 배우고 공연도 해보고 놀기도 한다고 했다. 엄마가 보내줄까 싶었지만 그런 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아리에서 같은 학번이라는 남학생 한 명이 집으로 전화를 했고, 김동진씨가 집에 없을 때 엄마가 전화를 받아서 모든 사단이 났다. 김동진씨는 아차 싶었다. 동아리방에 나간 것 자체가 며칠 되지도 않아서, 누가 집으로 전화를 하리라곤 아직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서 만난 몇몇 사람들에게, 엄마에게 비밀로 하고 나온다는 말 따위를 할 생각도 못했다. 그 당시는 아직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서로 연락은 집전화로 하던 시대였다.
김동진씨의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다. 무슨 이유를 들며 화를 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연극입네 하고 다니면 여자애가 문란해진다나 뭐 그런 말이었다. 거의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절대로 못 시킨다, 너 다리몽둥이 부러뜨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안된다 했다. 집안 어딘가에 항상 존재하던 각목인지 몽둥이같은 것인지를 들고서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이 욕설을 동반한 온갖 폭언을 퍼부었다. 김동진씨는 그 날로 연극 동아리를 접었다. 그리고 다시는 연극 동아리 비슷한 것도 쳐다보지 않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김동진씨의 엄마는 통제성향이 더욱더 심해져갔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김동진씨가 학원을 잘 다니는지 공부를 잘 하는지만 통제하면 되었다면, 이제 행동반경이 넓어진 김동진씨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다 통제하려 했다. 김동진씨는 새로운 일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엄마한테 혼날까 안 혼날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했고, 도대체 엄마가 뭘 좋아할지 알 수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어서, 새로운 시도는 저절로 잘 안 하게 되었다.
거의 유일한 대학 생활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던 연극 동아리가 좌절된 후 김동진씨는 상처받은 마음으로 한 학기를 보내면서, 무슨 동아리를 해야 엄마를 만족시키면서 나도 좀 숨통 트이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