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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15. 2020

하이힐에서 내려오다

운동화를 신고 캠퍼스 땅을 밟던 날

김동진씨에게는 대학 입학과 함께 처음으로 하이힐이 생겼다. 나중에는 집안의 원수가 되었지만 그 때 당시에는 엄마와 친하게 지냈던 둘째외삼촌이 김동진씨와 엄마를 백화점으로 불러내어 정장 한 벌과 하이힐을 사주었다. 김동진씨는 왜 갑자기 높은 구두를 신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렇게 해서 김동진씨에게는 5센티미터짜리 통굽 하이힐이 생겼다. 그 후 엄마는 김동진씨에게 낮은 굽의 구두를 한 켤레 더 사주었고, 김동진씨는 학교에 다닐 때 하이힐과 낮은 굽 구두를 번갈아가며 신고 있었다. 하이힐을 신으면 키가 커 보여서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발에는 영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일 단화를 신고 다니기에는 그 때 당시 캠퍼스의 분위기상 혼자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스니커즈도 유행하고 다양한 단화도 나오지만, 그 때 당시 캠퍼스의 분위기로는 모든 여자들은 다 하이힐을 신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김동진씨는 하루 단화를 신어 발을 쉬게 한 후 다시 하이힐로 갈아타는 형식으로 살고 있었다. 


당시 같은 과 동기들 스무 명 중 여덟 명이 여자였는데, 김동진씨를 빼고는 대체로 키가 크거나 얼굴이 예쁘거나 날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세가지 중 두 가지 이상을 고루 갖추고 있거나 해서, 김동진씨는 생애 처음으로 외모에 신경이 쓰였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나는 공부를 잘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텨왔지만, 대학에 오니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공부도 잘하는데 날씬하고 키 크고 예쁜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축되어 살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김동진씨의 엄마와 김욱진씨는 그렇게 하면 김동진씨가 살을 뺄 줄 알았는지, 지속적으로 김동진씨에게 살 쪘다며 구박을 하고 있었으니, 외모에 관해서 김동진씨는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단화를 신고 학교에 갔던 어느 날, 김동진씨와 키는 비슷하지만 김동진씨보다 많이 날씬했던 동기 여학생 한 명이 김동진씨에게 이런 말을 툭 던졌다.

"동진아, 너 왜 오늘 땅에 붙어다니니?"

허걱. "땅에 붙어다닌다"니! 자존심 강한 김동진씨에게 그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김동진씨와 키가 비슷하거나 좀 작은 것 같은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김동진씨는 그 이후 다시는 단화를 신지 않았고, 5cm에서 7cm, 9cm로 구두 굽의 높이를 높여갔다. 발바닥의 굳은살이 점점 더 딱딱해지고 넓어질수록, 외출 후 돌아왔을 때 발이 힘들면 힘들수록, 김동진씨는 아랫공기가 아니라 위엣공기를 마신다는 기쁨, 땅 위에서 붕 떠있으면서 얻은 키가 마치 진짜 나의 키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다닐 수 있는 능청스러움을 즐기며 살았다. 


그렇게 산 지 9년 째 되던 해, 김동진씨는 미국 조지아주로 박사과정 공부를 하러 떠나게 되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의 분위기를 지닌 대학도시의 캠퍼스, 그 곳에서 모든 여학생들은 다 "땅에 붙어다니고" 있었다! 운동화나 슬리퍼 이외의 신발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그 사이에서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김동진씨가 오히려 외계인같이 느껴졌다. 김동진씨는 얼른 운동화 한 켤레와 납작하지만 푹신한 슬리퍼를 샀다. 9년 동안 조그만 굽에 의지하여 힘들게 힘들게 땅 위에서 떠다니던 김동진씨에게 세상에 운동화의 편안함이라니! 게다가 아무도 나에게 땅에 붙어다닌다고 말하지도 않고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고 외계인처럼 쳐다보는 일도 없다니! 그 이후로 김동진씨의 발은 지금까지 주욱 편안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김동진씨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다시는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라고 아름다운 결말을 쓰고 싶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그래도 하이힐을 신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 5센티미터짜리 통굽 구두를 사오기도 했다. 논문 인터뷰를 위해 직장인 여성들을 만나러 갈 때 정장 바지를 입고 다시 하이힐을 신었다.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는 낮은 굽의 신발을 신고 산다. 남대문시장에서 15,000원 주고 산, 천으로 만든 단화는 5년째 하도 그것만 신었더니 너덜너덜해져서 버리기도 했다. 굽도 낮으면서 동시에 발이 편한 신발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비싼 브랜드에서든 싼 동네 신발가게에서든 열심히 찾아서 낮고 발 편한 신발을 신고 살고 있다. 


사실 지금이야 신발 회사들이 굽 낮은 신발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시기이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예전의 캠퍼스 시절처럼 모든 여자들이 하이힐만 신는 게 유행인 시대가 다시 온다 하더라도, 낮은 굽 신발을 신고 다니는 여자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아니, 이제는 아예 그런 시대란 오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하도 그것만 신고 다녀서 오른쪽 안쪽 부분이 살짝 찢어진 검정색 운동화는 아무래도 오는 날엔 신기 어려워졌으니 이제 새로 켤레 사기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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