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엄마가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기징역이 안 됐어?”라고, 베란다 의자에 앉아 시원한 밤바람을 쐬며 놀고 있던 둘째가 큰 소리로 엄마아빠의 대화에 한 마디 얹었다. 나는 퇴근한 남편에게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를 뉴스에 기반한 사실들과 함께 쏟아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 사이트는 미성년자 강간 영상만 취급하는 곳이었고, 6개월짜리 아기도 강간해서 영상을 올렸고, 약 3년간 그 짓으로 돈을 벌었다는 성범죄자가 배가 너무 고파서 계란 18개를 훔친 아저씨와 형량이 똑같다는 등등. 그런 중 불쑥 들려온 둘째의 말에 아, 너는 이제 부연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인 기혼여성이고, 페미니스트다. 한 동안은 이런 나의 삶이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것 같은 자괴감에 나를 페미니스트로 스스로 칭하지 못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냥 나는 이런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 아줌마 페미니스트라고 칭한다.
페미니스트건 뭐건 여자로 사는 삶이 팍팍해서, 아줌마 친구들과는 남편 욕을 곁들인 부부싸움 얘기, 가부장적인 시가 얘기, 육아에 이은 양육의 어려움 등에 대해 얘기한다. 몇 년 전에는 어떤 아줌마가 ‘남편들보고 공감 병신이라고 하더라구요’ 라고 말하는 걸 듣고 엄청나게 공감했던 적이 있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라는 걸 깨달은 후에는 더 이상 쓰지는 않았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남편들을 그렇게 표현하고 또 박장대소와 함께 그 표현에 공감하는 여자들의 마음에는 한맺힌 것이 분명히 한두개쯤은 있으리라.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엄마들은 아이의 성적과 대학 진학에 목숨거는 집단으로 우리 사회에 자리매김한 것 같이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4등’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엄마, 아빠, 아들 둘로 이루어진 가족의 엄마는 둘째아들을 데리고 절에 가서 기도를 한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엄마에게 부처님께 뭐라고 빌었는지 묻는다.
엄마: 응, 아빠 하는 일 잘 되게 해달라고. 형은 수영 금메달따게 해달라고 하고. 너는 공부 잘 하게 해달라고 빌었지.
아이: 그럼 엄마는?
엄마: 엄마는 ............... 없어.
n번방 사건이 언론의 조명을 받아 온 국민이 알게 되는 사건이 된 이후 엄마들 사이에서는 특히 아들들 엄마들이 모임을 조직해서 성교육 사교육을 받도록 시킨다는 뉴스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온 사회에 깔려 있는 좋은 엄마 신화 때문에 어떠한 일에도 엄마들은 반사적으로 아이들을 먼저 챙기게 된다. 물론 n번방 사건은 가해자 중에 10대 남자가 많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화들짝 놀라서 우리 아들 성교육 시켜야겠다는 데로 두뇌와 행동력이 따라가는 바로 그 엄마들 자신의 성은 어떤가. 나는 어릴 때부터 어떠한 문화에서 자라왔고, 여자로서 나의 성은 얼마나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기혼여성으로 살고 있는 지금도 남편과 평등한 섹스를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마도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저 위 영화 장면에서의 엄마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기도제목만 줄기차게 빌었지, 정작 자신을 위한 기도의 제목은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것처럼.
그런 삶이 과연 괜찮은 삶인 건가. 모든 것을 참고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상적인 어머니상으로 그려지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자라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로는 아이는 당연히 엄마가 돌봐야 하는 문화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나를 팽개치고 아이에 헌신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아이가 어릴 때는 유기농 식단과 제대로 된 생활습관 기르기에 열을 올리고, 아이가 커가면 아이의 공부에 열을 올린다. 장안의 화제였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는 예서 엄마가 예서의 방에서 그 동안 예서가 받은 상장들을 주욱 늘어놓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거 우리가 다 해냈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엄마가 해내는 일은 아이의 성적과 관련된 일이어야 한다. 엄마 자신의 일이 아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지금 엄마로 사는 우리 각자는 정말로 행복한가.
그리고 또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나는 내 딸이 나와 똑같은 삶을 살면 좋겠는가. 혹은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이렇게 소중한 내 딸을 잘 키워서 좋은 대학에 보냈는데, 동기 및 선후배 남학생들의 성희롱에 치이고, 성추행하는 교수 때문에 괴로워도 말도 못하고, 야근하고 돌아오는 밤길에 성폭행당할까 무서워 호신용 무기를 가지고 다녀야 해도 정말 괜찮겠는가. 이렇게 고이 기른 내 딸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더 적은 월급을 받아도 정말 괜찮겠는가. 내 딸의 남자친구가 둘이 섹스하는 장면을 몰래 촬영해두었다가 내 딸이 헤어지자고 하자 우리 집 대문앞에 대문짝만하게 인쇄해서 붙여놓고, 불법촬영한 섹스 영상을 퍼뜨리겠다며 딸아이를 지속적으로 협박해도 정말 괜찮겠는가. 내 딸의 대학 동창 남자애가 내 딸의 사진을 텔레그램에 공유해서 신상이 다 털리고 내 딸의 얼굴과 합성한 각종 더러운 사진을 몇만명의 남자들이 다같이 돌려보며 낄낄대도 정말 괜찮겠는가.
나는 내 아들이 마초 남자로 크는 게 정말로 괜찮은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내 어린 아들이 사회가 정해놓은 남성성의 기준에 자신의 가능성을 우겨넣는 게 괜찮은가. 예를 들어 다정하고 섬세했던 내 아들이 무뚝뚝하고 거친 상남자로 성장하는게 맞는 일인가. 내 아들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감정을 잘 표현하지도 못하고 가끔가다 폭력적으로 폭발하기만 하는 남자로 자란다 해도 괜찮은가. 가부장적 가치관을 온몸으로 습득해서, 엄마는 아빠가 벌어다주는 돈으로 놀고 먹기만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로 자라도 괜찮은가. 죄의식 없이 여자를 섹스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남자로 내 아들이 자라도 정말로 괜찮은가.
만일 위의 경우에 하나라도 괜찮지 않은 엄마가 있다면, 그 엄마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18쪽). 성차별주의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위에 열거한 예시들과 저기에 다 늘어놓지 못한 우리 삶의 불편한 점들을 모두 포함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과격한 집단이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영국의 여자들은 제발 여자에게 참정권을 달라면서 돌로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을 폭파시켰으니까. 십여년 동안 평화롭게 남자들에게 말해왔는데 바뀌는 게 없어서, 남자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말하자고 결의하고 과격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던 여성들은 결국 그 과격한 행동 끝에 참정권을 획득했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살아 생각조차 하지 않는 투표권이 사실은 약 100년 전 다른 어느 나라의 페미니스트들이 목숨 걸고 투쟁한 결과라는 사실을 돌아보아야 한다. (영화 ‘서프러제트’ 참고)
물론 세상이 전보다는 좋아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이 지금처럼 좋아진 것은 내가 무관심했던 사이에도 끊임없이 온갖 성차별 이슈들에 대해 투쟁해온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자로 사는 내 삶이, 즉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사는 내 삶이 팍팍하다면, 당신은 반드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여자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힘들게 살도록 만드는 사회 구조를 바꾸어가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적으로 세상이 바뀌어야 내 아이가 행복하게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바라는 게 사실은 그거 아닌가. 그렇다면 엄마들이여 우리는 이제 페미니스트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