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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07. 2020

원피스와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관점에서 본 류호정 의원의 복장 논란

학위를 받은 후 오랫동안 시간강사로 일을 하면서 나는 대체로 정장을 차려입었다. 가르치는 일은 똑같아 보일지라도 강사는 교수와 엄청난 사회적 지위 차이가 난다. 물론 강의하는 한 학기 동안은 학점을 주는 권한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지위와 권력이 생긴다. 그러나 나는 교수가 아니므로 내심 최대한 교수처럼 보여서 그렇게라도 권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때는 강의하러 간 복장 그대로 바로 친구의 결혼식에 가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그런 풀 세팅 정장으로 강의하러 가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스스로 세워놓은 이 규칙을 별 생각없이 스스로 따르며 살고 있었다. 


계기는 동네 옷가게였다. 우연히 들른 옷가게는 편안한 캐주얼을 주로 판매하는 곳이었고, 옷을 골라주는 센스가 좋고 코디 조언을 해주는 열성이 있는 30대 여자 사장님과 옷의 감각에 대해서는 어리버리한 나는 합이 잘 맞았다. 밑단의 올이 풀려있고 아주 조금 군데군데 찢어져 있는지라 내가 입어본 적이 없는 스타일의 일자 청바지는 허리에 숨겨진 고무줄이 있어서, 뱃살을 잘 커버하면서도 편안했다. 몸에 잘 맞아 편하고 예쁘지만 강의할 때 입기엔 어려울 것 같다며 망설이는 나에게 사장님은 강의할 때 입어도 된다며 같이 코디할만한 티셔츠와 남방을 골라주었다. 그 스타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찢어진 청바지와 남방을 샀다.


구체적으로도 아니고 막연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던 그런 일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들이든 복도에 지나가는 교수처럼 생긴 사람들이든 나에게 강의를 맡긴 선배 교수든 아무도 나의 찢어진 청바지와 남방 복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사실 강사로서 내가 수업에 들어가서 할 일은 잘 가르치는 일인데, 나의 복장에 따라 나의 전문성이 변할 리는 없었다. 모직코트에 정장 원피스를 입고 구두를 신고 가든 찢어진 청바지와 남방에 운동화를 신고 가든, 학생들이 강사로서의 나의 능력을 의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애초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던 것 같다. 스판덱스 함유량이 높은 청바지는 몸의 움직임에 맞게 잘 늘어나 너무도 편안했고, 구두 대신 신은 운동화는 지하철을 타고 강의하러 가는 길을 훨씬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학기에 나는 처음으로 우수강사상을 탔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란 우리가 문화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반복해서 수행(perform)해야 하는 행위라고 보았다(Judith Butler, 1990, Gender Trouble, 조현준 역, 2008,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마치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 양 우리의 몸으로 수행하는 행위가 젠더라는 것이다. 젠더란 연극 공연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주디스 버틀러가 제시한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연극배우들은 한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 공연을 한다. Perform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공연한다’, ‘행하다’, ‘수행하다’라는 뜻이 있다. 어떤 연극배우 본인이 배역맡은 인물과 동일인은 아니지만, 해당 무대에서 그 연극을 공연하는 동안만큼은 맡은 배역의 인물이 되어 그 연극을 공연한다. 젠더란 그런 것이다. 나에게 어떤 젠더가 주어진 상태에서 나는 인생 무대에서 공연하는 연극배우와 같다. 그 배역맡은 극중 허구의 인물이 진짜 나와 얼마나 같고 다른지 따져볼 새도 없이 나는 철저히 그 인물이 되어야 한다. 


강의하러 갈 때는 당연히 정장을 입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했던 것 자체가 젠더다. 강사의 복장이 정장이어야 한다는 것은 사회가 그렇다고 정해놓은 규범인 것이다. 정장을 입어야만 강의를 잘 할 수 있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하는 교수나 강사는 정장을 입는다. 이제 사회가 강제하는 이 규범은 한국사회에서 ‘예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까지 해서 통용된다. 그러나 막상 그 규범을 벗어던졌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몸과 따라서 편안해진 마음으로 학생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었다.


2020년 8월 6일,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국회 출근 옷차림 논란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도대체 저게 뭐라고 이렇게 수많은 여성혐오 악플과 기사가 쏟아져나오는지 의아할 정도다. 류호정 의원은 평균연령 54세 남성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드글거리는 그 국회의장에 의도적으로 저런 원피스를 입고 감으로써 정치적 행동을 했다. 여성스러운 원피스이지만 이 경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젠더를 뒤집어 엎은 행위가 된다. 기존의 젠더 질서를 뒤집는 행위, 몸으로 하는 행위들을 계속해서 해나가자고 주장했던 주디스 버틀러가 여기에 있었다면 아마 류호정 의원과 하이파이브를 했을 것이다. 


2020년 8월 6일 정의당 류호정 의원. 출처 동아일보.


나는 복장으로써 의도적인 정치적 행위를 한 류호정 의원을 지지한다. 복장이든 무엇이든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 젠더를 뒤집는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지한다. 그럼으로써 그 행위자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자신들이 생각하는 젠더란 무엇인지 아주 조금이라도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 질문하게 만들었다면, 그런 모든 행위자들을 지지한다. 그러한 생각과 질문, 스스로 하는 성찰이 변화를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나도 오늘 지인들과 함께 우리의 일상적인 복장에 얼마나 편견이 실려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이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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