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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만약에

만약에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행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이별 후 여행은 더욱 그렇다. 블루라군에서 신나게 다이빙을 마치고 숙소에서 뒹굴거리는 그녀에게 친구가 저녁 먹고 사쿠라바에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의 친구는 방비엥의 필수 코스라고, 여행와서 이런데 가보지 언제 가보겠냐고, 가볍게 춤추고 노는 곳이라고 설득한다. 그녀는 한번도 클럽이나 감주를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춤추고 노는지 조차 몰라서 망설여진다. 그녀는 걱정이 많다. 하지만 곧 여행지에서 내가 남자친구도 없는데 못할 게 무엇이 있겠나 싶은 생각에 호기롭게 좋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소극성과 회피성을 버리고 용감함을 택했다. 아, 그녀의 친구도 마찬가지로 클럽을 가본 적이 없다.


두 여자는 사쿠라바에 들어가자마자 뻘쭘함을 느꼈다. 낯선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옆 사람의 몸짓을 모방했다. 열심히 리듬타는 척 하다가 점점 구석으로 밀려나 모서리 언저리에서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녀는 리듬타는 척하는 자신이 민망했다. 아무리 방비엥의 필수코스지만 그녀와는 별로 상성이 맞지 않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는 찰나, 스테이지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낮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사람이었다. 스테이지가 제것인양 아주 신나게 놀아서 구경하던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칠 정도였다. 되게 잘 노는구나. 저렇게 놀면 정말 재밌겠다.


한창 춤을 추며 놀던 그가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한다. '낮에 블루라군에서 뵀었죠? 여기 계시네요!' 그녀는 반가움에 최대한 친근감을 표시하며 눈인사를 한다. 까딱. 그러다가 이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와 함께 숙소로 돌아간다. 다음날 버기카를 타고 물놀이를 하고 라면을 먹으며 신나게 여행을 즐긴다. 그 다음날도 그렇게 놀았다. 엔돌핀이 팍팍 뿜어나온다. 그녀는 액티비티와 상성이 잘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밤이 되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고, 숙소에서 그녀와 그녀의 친구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사쿠라바를 한번 더 갈것인가 아니면 숙소에서 쉴 것인가. 그녀의 기준은 명확했다.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 사쿠라바에서 제대로 못 논 게 후회가 될까 숙소에서 못 쉰게 후회가 될까. 당연히 전자였다.   




여행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는 원래 용감하다. 무엇이든 저지르면 어떻게든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선택에 있어 고민이 없다. 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것이다. 나중이 걱정되서 하고싶은 걸 미루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는 어리석음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오랜만의 여행에 마음이 부풀어올랐고, 그 여행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 그는 음주가무 중에 가무를 즐기는 사람이므로 방비엥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사쿠라바에 갔다. 그는 용감했으므로 스테이지에 올라가서 놀았다. 맥주를 뿌리며 놀았다. DJ 형과 친해지고 페북 친구도 맺었다. 드문드문 있는 외국인들과 콩글리쉬로 대화하며 놀았다. 그는 용감한 사람이라서 그 모든 게 쉬웠다.


그렇게 신나게 놀던 중 저 구석에 그녀와 그녀의 친구가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나를 알지 않냐고 같이 놀자고 하고 싶었다. 그는 용감한 사람이지만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혹시 그를 못 알아보지는 않을까, 혹시 그가 너무 날티난다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느끼진 않을까. 그는 스테이지에서 내려가 어떻게 말을 걸면 젠틀하면서도 센스있을까 고민하던 중 다른 남자 무리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한 듯 하다. 이러다가 다른 놈들이 그녀에게 접근할까 초조해진다. 그는 용감한 사람이지만 그 모든 게 어려웠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낮에 블루라군에서 뵀었죠? 여기 계시네요!' 그러자 그녀는 까딱. 눈인사만 한다. 눈인사만 한다. 눈인사만 한다. 도저히 다음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 후퇴하자. 그는 당황하지 않은 척 서운하지 않은 척 자연스러운 척 스테이지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녀에게 자꾸 관심이 가고, 더 얘기해보고 싶고, 연락처도 교환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아까 거절당한 남자 무리가 생각난다. 그도 그렇게 거절 당한건가 생각이 들면서 살짝 의기소침해진다. 숨을 좀 고르고 다시 그녀가 있던 구석으로 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쿠라바를 나가고 없었다.




다다음날 밤, 그녀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사쿠라바에 갔다. 그는 혹시 그녀를 한번 더 볼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태국 일정을 줄이고 방비엥에 하루 더 머무르기고 한다. 그는 그녀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을까봐 걱정하면서 사쿠라바에 갔다. 그리고 그들은 사쿠라바에서 다시 마주쳤다.  DJ는 압도적으로 많은 한국인들을 위해 빅뱅의 붉은 노을과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틀어주었다. 사쿠라바는 떼창과 함께하는 한국인의 노래방이자 콘서트장이었다. Handclap 같은 아는 노래가 나오자 그녀도 함께 타이밍을 맞추어 박수를 친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같은 리듬으로 방방 뛰면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았다. 엔돌핀이 격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그는 그녀에게 용기를 짜내서 친구들과 같이 야외에서 맥주를 마시자고 제안한다. 그녀의 눈빛에 걱정이 스친다.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제발, 제발, 제발.


그와 그의 친구, 그녀와 그녀의 친구는 슈퍼에서 맥주를 산 뒤, 길에 있는 주인 없는 테이블에 앉는다. 그렇게 새벽 3시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한다. 여행 얘기, 일 얘기, 사는 얘기.... 그녀와 그녀의 친구가 이제는 자러가야겠다며 엉덩이를 들썩일 때, 그의 친구가 한국에 돌아가면 이것도 인연인데 부산에서 한번 더 모이자고 제안한다. 그의 친구가 그에게 윙크를 한다. 그는 그의 친구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녀의 친구는 사정이 있어서 갈 수 없다고 아쉽다고 거절했다. 그는 그녀의 친구에게 원망을 느낀다. 그녀의 눈빛에 걱정이 스친다. 친구도 없이 혼자서 만나러 가는 게 영 부담스럽다.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제발, 제발, 제발.




용감한 사람이 용기를 잃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쥐어짜내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 용기를 내는, 평소와 다른 작은 선택이 온갖 경우의 수 중에서도 기적을 만들어낸다. 만약에 그녀가 춤추는 게 어색하다며 사쿠라바에 가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가 하루 더 방비엥에서 머무르는 것으로 일정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가 그녀에게 길에서 맥주 노상을 하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부산에서 다시 한번 더 모이자고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이 이야기는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용기를 내면 분명히 일어난다. 아주아주 멋진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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