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랑은 힘이 세다

행성을 품은 사랑이 흔치 않을 뿐이다.

사랑은 무엇까지 가능하게 하는가. 사랑의 잠재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지만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랑은 힘이 없다고, 사랑보다 중요한 게 많다고, 사랑은 그저 호르몬의 화학작용일 뿐이라고.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은 생각보다 훨씬 힘이 세고, 무엇보다 중요하고, 호르몬의 화학작용 이상의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를 만나고 그녀는 사랑의 잠재력에 감탄한다. 어떤 사랑은 행성을 품고 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중력 에너지를 가진다. 다만 안타까운 일은, 행성을 품고 있는 사랑은 결코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사랑을 깎아내린다면, 그녀는 속으로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런 사랑은 결코 흔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부산에서 한번 더 보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진 다음, 그는 여행 일정대로 태국에 갔다. 몸은 태국으로 갔지만 마음은 아직 그녀가 있는 방비엥에 있다. 그의 마음이 부드럽게 부풀어올랐다. 고소한 냄새도 난다. 잘 익은 식빵 같다. 그는 태국에 있는 내내 그의 친구에게 그녀 이야기를 한다. 방콕의 짜뚜짝 시장에 가서 그는 가죽 여권지갑을 기념품으로 산다. 하나가 아니라 두개. 그와 그녀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다. 물론 누가봐도 커플 여권지갑 느낌이 나게 같은 디자인으로. 그의 친구는 고개를 젓는다. 완전 미친놈이라고. 김칫국을 사발로 마신다고.그는 또 그녀 이야기를 친구에게 한다. 그의 친구는 이제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 그는 해맑게 웃는다. 미친놈 취급 받는 게 행복하다.


그들은 특급 호텔의 해산물 뷔페에 갔다. 여행 내내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며 숙소에는 3만원도 안썼지만 먹을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양껏 조개를 가져와서 굽기 시작한다. 그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지만 그래도 뷔페에 왔으니 작정하고 뽕을 뽑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열심히 접시를 비우면서도 그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의 친구는 그가 얄미우면서도 저렇게 좋을까 부럽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일단 그가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으니 조개를 먹이자. 그는 막 입을 벌린 조개를 그에게 권한다. 그는 고맙다며 냉큼 집어먹는다. 아주 맛있다며 흡족해한다.


그들은 조개가 입을 벌리면 조금 더 익힌 다음 먹어야 하는 건지 몰랐다. 그의 친구는 그가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으나, 앞에서 사라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는 폭풍 설사를 하느라 계속해서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그의 친구는 친구 없이 외롭지만 맛있게 식사를 즐겼다. 속이 뒤집어져서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는 그에게 그의 친구는 너무 많이 먹어 더부룩하다며 사이다 한병 시켜도 되냐고 물었다. 찐 친구란 그런 것이다. 그는 너무 배가 아파 화장실에서 낮에 사둔 커플 여권지갑을 놓고 온 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뒤집어진 속이 가라앉길 바라며 하루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한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절대 괜찮지 않았다. 덜 익은 조개가 초래한 파국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이틀 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조차 괴로워했다. 바로 다음날이면 부산에서 그녀를 보기로 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아쉽지만 그래도 만날 수 있는 게 어디냐 생각하는 찰나, 그의 친구가 공항에서 바로 집에 가겠다고 얘기했다. 그의 친구에게 인천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부산으로 갔다가 반나절 놀고 다시 집이 있는 경기도로 오는 건 미친 짓처럼 느껴진다. 그는 그녀를 보러 가는 거지만, 그의 친구는 부산에 갈 이유가 없다. 그는 그의 친구에게 무릎을 꿇는다. 사랑은 무릎을 꿇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는 그의 친구가 부산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 그녀도 자연스럽게 만남을 취소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에게 부산까지 오는 KTX비를 모두 대 주고, 부산에서 경기도로 온전히 그가 운전해서 그의 친구 집 앞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주기로 약속한다. 사랑은 돈보다 편안함보다 중요하다.


아무튼 그래서 결국 그들은 부산에 모인다. 그녀는 그에게 부산에 있다던 친척 결혼식은 잘 다녀왔냐고 묻는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의 친척 결혼식은 대구에 있었다. 그녀가 부산에 사는데, 그래서 당연히 부산에 가야 하는데, 혹시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봐 그는 마침 부산에 결혼식이 있다고 뻥을 쳤었다. 그는 잘 다녀왔다고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대답한다. 그의 식빵이 더 부풀어 오른다. 버터향이 솔솔 난다. 그의 친구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개를 젓는다. 역시 미친놈이야.


셋은 수변공원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방비엥에서 노상으로 맥주를 먹으며 얘기했을 때처럼 일 얘기, 사는 얘기, 영화 얘기를 한다. 그러다가 회보다 더 좋은 안주가 한 가지 있음을 깨닫고 대화 주제가 바뀐다. 연애 얘기다. 그의 친구가 지난 연애를 얘기하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바통을 이어받아 전남자친구와 첫연애를 5년 동안 하고 2달 전에 헤어졌다고 얘기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운전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는 것이 속상하다. 술을 마시면 씁쓸한 표정이 나와도 알코올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 텐데. 그의 친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되겠네. 5년이나 사귄 사람을 2달만에 어떻게 잊어. 쯧.


시간이 제법 지나고 그녀는 이제 그만 집에 가야겠다고 일어선다. 그는 그녀에게 데려다 주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거절한다. 그의 친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끝났네. 그의 친구는 어떤 위로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찐 친구이기 때문이다. 찐 친구는 이런 상황에서 위로를 하는 게 아니라 평생 놀릴 준비를 한다. 그의 친구는 죽을 때까지 우려먹어야지 생각한다. 그는 그녀와 헤어지고 바로 경기도에 있는 그의 친구 집으로 운전을 한다. 그의 친구는 쿨쿨 잠을 잘만 잔다. 그와 그의 친구 사이에는 보조석에 앉은 사람이 운전자에게 커피를 사주거나 말을 걸어주는 그런 배려가 없다. 왜냐하면 찐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생각하고 생각한다. 굉장한 악조건이다. 인정한다. 경기도에서 부산까지 400km. 그녀는 5년 사귄 남자친구와 2달 전에 헤어졌다. 어쩌면 미련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 얘길 한 걸 보니, 그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조건이 안 좋아도 그는 그녀가 포기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행성을 품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중력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는 그 모든 에너지로 그녀를 들이받을 것이다. 그런 사랑이 있다. 그런 사랑은 힘이 세다. 결코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그런 사랑은 흔치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많은 만약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