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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함을 선택하기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산다. 잊어버렸다는 사실도 잊어버린채 살아간다.

우리는 단 하나는 기억해야 한다. 그 하나를 기억해야함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날이 있다. 이리 치리고 저리 치이고 비틀비틀 휘청휘청 그냥 뻗어버리고 싶은 날이 있다. 침대에 눕자마자 도피하듯 잠드는 그런 날들이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엔 누웠을 때 잠들지 못하는 날이 온다. 흉통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는 날이 온다. 그런 날엔 침대에 누워서 잠 못 이루며 계속 같은 생각을 한다.

'다 엎어버리고 싶다'

'내 인생은 너무 불행해'

'희망이 없어'




그는 바쁘다. 그는 정말 바쁘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노력과 무관하게 터지는 사건사고들을 처리하고, 또라이 총량의 법칙에 따라 당연히 그의 부서에도 존재하는 또라이 직장 동료의 뒤치닥거리를 하고,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듯 하루종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온갖 밀려오는 업무를 쳐내고, 그래도 시간이 모자라서 정말 오늘만큼은(실은 늘 하기 싫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더더욱.) 하기 싫었던 야근을 또다시 반복하며 기계처럼 일하고 드는 생각은

'지금 나 뭐하고 있는 거지?'



모두에게 하루는 공평하게 24시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에게 24시간은 유난히 짧다.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출근을 해서 21시에 퇴근한다. 집에 돌아와서 늦은 저녁을 챙겨먹고 씻고 정신차리면 이미 22시.  하루에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 2시간도 확보되지 못하는 삶. 그는 정년을 채우기는 커녕 앞으로 5년도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스스로에게 가장 자괴감이 드는 부분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진이 빠져서 그녀와 전화할 때 그가 건성으로 전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와 그녀는 주말부부다. 평일에는 자기 전에 전화를 하면서 서로의 하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항상 같은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오늘은 뭐가 좋았어?" 소중한 순간을 찾길 바라는, 섬세한 감수성이 담긴 질문이다. 그는 그녀의 감수성에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현실이 너무 팍팍하고 흉통이 느껴지는 날엔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사랑스럽게 대답하기가 힘들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녀가 언제나처럼 미주알 고주알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그에게 상냥하게 질문한다.

"오늘은 뭐가 좋았어?"

그는 대답한다.

"오늘은 하나도 안 좋았어. 정말 쓰레기 같았어."

그는 곧 뾰족하게 대답을 한 것을 후회한다. 그녀에게 걱정끼치기는 싫은데 그냥 적당히 둘러댈 걸... 그녀가 무슨 일이냐며 걱정된다며 말해보라고 했지만 그는 대답을 피했고 적당히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그녀와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한다. 그는 바쁘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불행한가? 아니다. 그녀가 있으면 불행할 수가 없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불행을 극복할 수 있다. 그의 옆에는 절대적인 내편인 그녀가 있다. 힘든 거 다 안다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그녀가 있다.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며 등을 토닥여주는 그녀가 있다. 그러므로 그는 불행하지 않다. 사람은 전적으로 나를 위해주는 존재가 있으면 불행을 극복할 수 있다. 힘을 낼 수 있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는 쪼그라든 마음을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오늘 무엇이 좋았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첫째로, 아침에 그가 운동을 하러 간 것에 그녀가 멋진 내 남편이라고 칭찬해주었다. 그의 장래희망은 멋진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냥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 멋진 그녀의 남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 말을 들었을 때마다 꿈을 이룬 기분이 든다.


둘째로, 직장에서 동료들과 다같이 냉면을 먹으러 갔는데, 얼마전에 그녀와 먹었던 냉면집과 비교해보니 그때가 더 맛있었다. 그녀랑 더 맛있는 냉면을 먹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그녀에게는 맛있는 것만 먹이고 싶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가 화장실에서 큰 볼 일을 보고 있을 때 그녀가 퇴근은 잘 했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볼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 전화를 끊자고 하니, 그녀는 안된다고, 끊을 수 없다고, 전화를 하면서 볼 일에 집중하라고 장난을 쳤다. 하루 종일 딱딱하게 굳었던 그의 미간이 긴장을 풀고 부드럽게 펴진 순간이었다. 결국 그는 한참을 볼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전화를 했다. 물론 전화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깔깔 웃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에겐 선택지가 두 가지 있었다. 쪼그라든 마음을 그대로 둔 채 그냥 자는 것과 쪼그라든 마음을 다시 부풀려서 그녀에게 상냥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 누구에게나 선택지는 주어지며,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오롯이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는 몹시 피곤하고 지쳤지만, 눈을 감자마자 기절하듯 잠들 것 같지만, 그녀를 위해 그녀에게 카톡을 보낸다. 그의 카톡에는 상냥함이 깃들어있다.

'여보, 오늘 더 달달하게 이야기하지 못해서 미안해. 오늘 어떤 게 좋았는지 말해줄게.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생각해보면 기분 좋은 일이 너무 많은데 아까는 마음이 많이 안좋아서 생각이 나지 않았나봐. 앞으로는 더 달달하게 전화할게.'


그는 카톡을 보내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하지만 잠들기 전 몇초간은 입술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녀가 그의 카톡을 읽고 미소가 머금어졌던 것처럼. 그의 마음이 부푼 것처럼 그녀의 마음도 부풀었다.




그는 많은 것을 가졌다. 성실함, 삶을 제대로 살아내려는 의지, 사랑, 모든 것을 다 헌신하고 싶은 가정,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유머감각, 장 건강... 그는 많은 것을 가졌음을 잊고 살았다.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는 사실 조차 잊고 살았다. 그는 이제 단 한 가지는 기억하기로 다짐했다. 상냥함을 선택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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