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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Aug 10. 2020

네가 그렇게 말했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이번엔 정말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네가 그렇게 말했다. 좀 더 정확히는 이번만큼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그러고 싶다고.



너는 매번 그런 결심을 하면서 꽤나 여러 번 떠나 왔을 테고 그것만큼을 정직하게 다시 돌아갔음을 나는 짐작 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가지 않을 사람 치고는 너의 짐은 너무 번잡했다. 단순히 짐이 많다는 문제가 아니다. 배낭을 가득 채운 네 짐은 분명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갈 여행자의 짐이었다.

가령 어머니가 좋아할 것이라며 몇 번이고 꺼내 보던 식탁보라던가, 아버지께 어울릴 것이며 어제 나와 함께 벼룩시장에서 산 빈티지 라이터 라던가, 엘피를 모으는 여동생을 위해 어렵게 구한 비틀스의 한정판 엘피판이라던지. 그런 것들 말이다. 이곳에서의 너의 여행을 네가 있던 곳의 사람들에게 전해줄. 그러니까 네 짐은 네 것보단 너의 누군가를 위한 것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의 목적지는 역시나 원래 네가 있었던 곳이 아니면 도대체 어디겠는가.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런 의문 섞인 질문이 튀어나오려다가도 네가 워낙 자신 있게 돌아가지 않겠다 말했으니 그 자신에 찬 눈빛에 나는 심술 맞은 질문을 삼킬 수밖에.



여행을 하는 사람들, 적어도 있던 곳에서 잠시 멀어진 사람들에겐 비슷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는 들떠있지만 중심이 잡혀 있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것의 깊은 곳에는 다른 곳을 향한 그리움이 있다.

모진 말을 듣고는 마음이 어질 해져 떠나왔겠지만 그 말들은 결국 여행의 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마음의 폭을 그것보다 더 넓혀간다.

내딛는 첫걸음의 방향은 있었던 곳의 반대편이었지만 긴 여정의 목적지는 결국 있었던 곳으로 수렴하고, 그리고 그때 차마 꺼내지 못했던 몇 마디의 마음들이 이제는 여물고 단단해져 누군가에게 풀어질 준비를 마친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일 테고 그것이 여전히 잘 보이진 않지만 적어도 그것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여행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그런 여행자였고, 이런 우리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 처럼 나누는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두 잔째 마시고 있는 맥주를 다 마시면 나는 네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방에 돌아가 잠을 자야겠다 생각했다. 내일의 일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술이 약한 네가 맥주를 한 잔 더 시키고 취기가 오르면 아마 같은 이야기를 새벽 내내 반복할 테니까. 어제처럼 말이다.



호주의 시드니는 다양한 여행자들로 가득하다.

거리마다 자유라는 모양의 공기가 가득 차 있으니 세계의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희망을 품고 모여드는 것이다.

여행이 주는 희망의 가능성. 여행과 희망이 만났으니 충분히 낭만적이다. 그것을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당장 잡히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으로 힘이 나고 그것 때문에 허기지지 않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도 이곳에서는 저절로 될 것 같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와 비슷한 너를 만나 기분이 좋기도 했다.


방 안, 너의 침대 옆에 놓여있는 배낭이 눈에 들어왔다. 배낭을 가득 채운 것들은 어쩌면 짐이 아니라 너의 애틋한 마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메말라 가뭄처럼 떠나왔다가 장마를 만나고는 흠뻑 젖어버린 너는 그 행복한 축축함으로 따듯하게 너의 나라로 돌아가겠지.

돌아가지 않겠다 말했지만 사실은 넘치게 그리운 너의 나라로.



여행이라고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어쩔 수 없는 발걸음이었을 테고, 그 어쩔 수 없음이 때론 모진 마음을 먹게 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우리 모두에겐 있는 것이다. 돌아가기 위해 떠나온 나도 그리고 너도.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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