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전호 Nov 24. 2021

고양이를 안고 있는 남자

 전부터 몇 번인가 선생님께 편지를 쓰려고 펜을 들어보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서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일상(제 생각엔)을 편지지에 써놓는다면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선생님께서 당황하실지도 모르니까요. 이 친구는 고작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편지를 썼나?라고 생각하실 테니까요. 분명히. 그런데 얼마 전 저에게도 큰일이(이제는 선생님께 편지를 쓸 수 있을 만큼의) 생겼습니다. 슬픈 일이었습니다.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습니다. 제가 기르는 두 마리 고양이중 갈색 여자 아이 가요. 두 달가량 힘들게 힘들게 고생하다 떠난 거라 어떻게 보면 저에겐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저는 나름의 준비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닥치고 나니, 그 상실이라는 것이 드디어 제 손 위에 올려지고 나니, 저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상실이라는 것은 형체를 지니고 있지 않아서 난감하기만 합니다. 무게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습니다. 그저 빈자리만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있었던 것이 사라진 그 공간의 크기를 누구에게도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냄새를, 촉감을, 그것들이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얼마만큼이었는지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실이 불러온 슬픔이라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이 자꾸만 제 안에 쌓여만 가고 있습니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쌓여만 가니 그 맨 아래층은 단단하게 굳어버린 화석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그래서 요즘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상적인 생활은 별 다른 문제없지 잘해나가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 씻고 출근을 합니다. 회사에선 성실히 일을 하고 동료들과는 웃으며 농담도 합니다. 끼니때가 되면 맛있는 음식도 잘 먹고 종종 친구들과 술도 한잔씩 합니다. 제 일상을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성실하고 지루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주변 지인들도 제가 괜찮은 줄 알고 저 조차도 이제는 괜찮다,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 편지를 읽고 계실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제가 괜찮은 건 아닐까, 엄살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요 선생님, 사실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제가 특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커다랗고 까맣고 깊은 구덩이에 빠져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니, 상황 자체는 정말 단순합니다.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의 원인과 그것이 불러온 결과도 결코 그렇게 복잡하거나 까다롭지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택시에 올라타 기사님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도착하면 내리면 되는 것처럼요. 누군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라고 물으면 택시 타고 왔어,라고 대답하는 것만큼 쉽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다. 잠을 자지 못하면 졸리다. 맞으면 아프다. 이런 것처럼요. 상실이 슬픔을 동반한다는 것쯤이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제 상실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고만 하면 말이 통 나오질 않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말을 하는 저도 대답을 듣는 상대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전혀. 결국 상실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 이건 내 문제가 아니구나. 원래 그런 거니까,라고 깨달음인지 포기인지를 해버렸습니다.

 앞의 이야기가 조금은 복잡했습니다. 어쩌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길게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제가 지금 이런 상태다,라고 설명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선생님께 무슨 치료법이나 해결책 같을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상실로 일어난 제 삶의 일정 부분의 공백은 누군가에게 떠넘기거나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니까요. 애초에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대체 불가능성을 상실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곳은 작은 거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집에 와본 적이 없으시니 간단히 설명을 하지면 특색이 없는 거실입니다. 거실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실. 작은 테이블과 그것만큼의 작은 의자, 그것들에 어울리는 작은 스탠드 그리고 책꽂이가 있습니다. 이곳에 처음 이사를 왔을 때 필요한 것들은 천천히 채워 넣자 생각했었는데 일 년이 넘게 지내면서 그다지 필요한 게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책도 읽고 간단하게 끼니도 해결하고 종종 노래를 듣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처럼 무언가를 쓰기도 합니다. 이 특색 없는 거실에서 저는 집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테이블 위에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놓여 있습니다. 총 세 권인데 저는 첫 번째 책의 첫 장도 아직 다 읽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책을 꽤나 많이 읽는 편인데도 왜인지 이 책은 잘 읽히지가 않더라고요. 러시아 인물들의 이름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익숙지 않은 이름들이 너무나 많이 나와서 그런지. 책장을 몇 장 넘기다가도 이 인물이 누구였지? 하면서 자주 앞 쪽으로 되돌아가곤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다 읽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지냅니다. 사실 이렇게 읽지 않은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건 책에게도 미안한 일입니다. 당장 읽지 않을 거라면 정리해서 책장에 꽂아두면 될 일인데. 뭔가 책에게 희망고문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죄책감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게로 전이됩니다. 우스운 일이죠.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게다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다니. 가끔은 꿈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물론 제가 멋대로 이미지를 만들어 낸 인물들입니다. 이 책엔 삽화가 없으니까요.) 이마를 찌푸리며 '우리는 그런 푸대접을 받을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 가문은 말이지...' 라면서 저를 원망의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합니다. 미안한 건 미안한 일이지만 뭐 저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읽히지가 않는걸요. 그리고 LAMY만년필이 한 자루 있습니다. 저는 주로 진한 파란색 잉크를 넣고 사용합니다. 지금 선생님께 쓰는 편지도 이 만년필로 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실 글씨를 쓸 일이 많이 없어서(대부분은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사용하죠) 잉크는 충분히 남아 있습니다. 저는 만년필로 글씨를 쓸 때 느낌을 좋아합니다. 표면이 투박한 종이 위에 만년필의 펜촉이 스쳐 지나갈 때 거친 느낌. 그렇다고 만년필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사야 할 식재료의 목록이라던지 주말에 해야 할 집안일을 적는 메모에는 만년필을 사용하진 않습니다. 그럴 땐 눈에 띄는 아무 볼펜이나(제 경우엔 주로 모나미 볼펜입니다) 손에 쥐고 쓱 휘갈겨 쓰면 됩니다. 반대로 만년필로 직접 글씨를 쓰게 되면 스스로도 조금은 차분해집니다. 글씨를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커피잔이 놓여 있습니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가 절반 정도 남아 있습니다. 폴란드 여행 중 지인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사온 잔인데 여행 후 지인을 한동안 만나지 못해서 그냥 제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테이블 위의 물건은 대충 이 정도입니다. 테이블의 왼쪽 벽에는 커다란 창이 있고 커튼은 없습니다. 커튼도 달아야지 생각은 했지만 지내다 보니 별로 필요하진 않더라고요. 설명이 길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역시나 심플한 거실입니다. 사람이 지내고 있다는 흔적만 겨우 찾아낼 만한 공간. 생활인의 거실이라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 사람이 깜빡(아니면 일부러) 놓고 간 물건들이 쓸쓸히 남아있는 것 같은. 제 집의 다른 공간들은 거실보다 더 특색이 없습니다. 특색이 없는 침실, 특색이 없는 화장실, 특색이 없는 부엌. 그래서 그곳들에 대한 설명은 생략할까 합니다. 이미 편지가 많이 길어져 버렸고 선생님께서 관심을 가질만한 특별한 공간들은 아니니까요.

 

 고양이가 제 곁을 떠난 뒤에 저는 "처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아니 기억을 꺼내보려 했다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고양이와 처음 만났던 그 첫 순간 말이에요. 분명히 어떤 한순간으로 이미 일어난 일인데도 희미하지만 차곡차곡 쌓여간 시간 때문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거짓말 같겠지만 그 첫 순간이 무척이나 특별했다는 느낌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나머지는 기억의 정경 저 멀리 사라져 버린 겁니다. 마치 바람이 빠져버린 풍선처럼요. 선생님, 망각이 인간에겐 축복이라는 누간가의 말이 저는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상실을 극복해보고자 마지막 모습을 처음 모습으로 덮어보려 했던 노력이 헛수고가 된 거죠. 고양이의 마지막 모습은... 이렇게 말하긴 뭣하지만 기억하기 싫은 모습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생명체는 지쳐있는 육체와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영혼이 반씩 섞여있는 모습입니다. 존재가 희미해지고 투명해져 갑니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조금씩 멀어집니다. 움직임이 여려지고 풍성했던 솜사탕이 작은 설탕 덩어리로 쪼그라드는 것처럼 볼품없이 작아집니다. 거기에서 저는 인생에서 백 퍼센트인 건 죽음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백 퍼센트인 건 죽음뿐이다.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보니 정말 맞는 말 같았습니다. 확신이 생긴 거죠. 선생님. 선생님은 인생에서 죽음 말고 백 퍼센인걸 알고 계시나요? 전 아무리 머리를 굴려 골똘히 생각을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사람의 감정도 절대 백 퍼센일 수 없습니다. 가령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백 퍼센트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게 요즘 세상이니까요.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하는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우주의 어느 먼 곳에서는 떨어진 사과가 다시 떠올라 나뭇가지에 달라붙을지도 모르니까요. 코끼리를 보고 코끼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단지 사람이 만들어낸 선언일뿐입니다. 그리니까 현상이라던지 선언이라던지 그런 건 결국 작은 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작은 틈으로 무언가 비집고 들어오기만 하면 종국엔 그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맙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이런 허점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그러니까 스스로 백 퍼센트를 주장할 수 없는 것들은) 피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코를 막고는 조그만 옷장 안에 숨어버린다면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피해 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죽음은 분명히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피하려 어딘가로(가령 깜깜한 옷장이라던지) 숨어도 집요하게 따라와서는 결국 제 몫을 받아갑니다. 희망도 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백 퍼센트입니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백 퍼센트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건 욕심입니다. 네. 저는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라는 걸.


 그러니까 사실 선생님께 이런 장황스런 편지를 쓸 시간이 있으면, 저는 가엽게 제 곁을 떠나버린 고양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합니다. 의식적으로 마음과 시간을 들여 순종적으로 그것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제 상태를 벗어나는 가장 빠른 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무지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유일한 백 퍼센트조차 지금 제겐 와닿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만년필에 꾹꾹 눌러 담아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무서운 건 이런 겁니다. 상실이 만들어낸 커다란 구멍이 서서히 메워지고, 그 빈약한 흔적 위에서 저는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 버리지는 않을까. 바늘 끝에 까만 물감을 묻혀 흰 도화지를 느리지만 확실하게 흰 부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까만색으로 채워버리듯 언젠가는 제가 애초에 상실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렇게 상실감이 사라져 버린다면 제 고양이는 영영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닌지. 아예 없었던 존재가 돼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것들이요. 저에게 전부였던 세상이 사라져 버린 것보다 더 슬픈 건 말입니다 저를 세상의 전부라 여기던 존재가 사라지는 겁니다. 제 멋대로 상상한 것이지만, 아마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몇 번 더 펜을 들어 선생님께 편지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있었던 존재가 지워져 버리고 없었던 존재가 되어 그런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제 곁을 떠나버린 존재를 여전히 제 옆에 있는 것으로 여기며 잘 살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제게도 오겠지요.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 매거진 <단편 소설>은 글쓴이의 상상을 다양한 형식으로 풀어낸 픽션입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