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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Sep 29. 2024

옛 시인들의 노래로 의연한 정원

광주 풍영정 원

광주 풍영정 원림 – 옛 시인들의 노래로 의연한 정원     


풍영정 정자 마루에 앉아 시간의 풍경을 읊다     


광주 풍영정 원림을 찾았다. 문중의 원림 관리가 매우 잘 되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정성스러운 뜻이 새겨져 정갈한 풍경을 자아낸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오래된 들판과 영산강으로 이어지는 칠천(漆川, 극락강)이 한눈에 내려 보인다. 원림의 지정학적 위치가 기막히다. 옛날에는 정자 아래 극락강에 바닷물이 밀려 소금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풍영정 원림은 뛰어난 풍광이 기본 골격이다. 원림 경영의 목표 설정에서 이미 수준 높은 안목이 절로 묻어 나온다. 풍영정은 칠계(漆溪)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지은 정자이다. 칠계라는 호에서 보듯 정자 아래 흐르는 강물이 칠천(漆川)이고 극락강이며 영산강과 합류한다. 일반적으로 16세기 광주 지역을 대표하는 산수 원림이라고 일컫는다. 풍영정 정자 마루에 한참을 앉아 시를 읊는다.                   

풍영정 전경 (2023.03.16.)

풍영정에 깃든 시간의 풍경      

온형근          




 풍영정은 극락강을 굽어보며 멀리 들판과 마주한다.     


 광주역 철길이 놓였을 때는 힘차고 활발했던 역마차 바퀴 소리였겠지

 풍영정천 천변을 끼고 아파트 단지 들어설 때 기어코 돌계단 아래 입구부터 잠가야 했을 테지     


 앞뒤의 세월을 예언처럼 꿰뚫어 보았던 풍영정

 떨어진 현판 글자가 오리로 날아오를 때 이미 알고 있었지

 풍영정 야트막한 산이 범할 수 없는 호랑이 앞발을 지녔음을

 뜀박질하려 잔뜩 웅크린 등짝에 올라앉은 풍영정     


 운암산과 대마산은 생생하고 어등산은 가려졌으니

 소금 배 접안하던 단애취벽은 철교를 얹고

 물 깊고 고요한 풍담을 길게 이은 버드나무 숲이었을까

 풍영정 느티나무는 숲을 열고 닫으며 우거졌다.     


 정자마루에 앉으면 오백 년이 증강 없이 펼쳐지고

 옛사람 오가는 상우의 만남으로 원림이 분주하다.     


-2023. 3. 16.    

      

풍영정 정자 마루에 앉아 풍영정의 세월을 온몸으로 받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변 환경이 참 많이 변했다. 그래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킨다. 풍영정의 의젓한 면모가 지조를 지녔다. 극락강과 들판을 마주하던 과거와 현재가 쏜살같이 흐른다. 광주역으로 오가는 철길이 놓였고 역마차 바퀴 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졌던 것 자체가 근대화이다. 풍영정천 주변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풍영정 입구를 잠가야 했을까. 한적한 풍영정이 이처럼 도시 한가운데로 변하리라고 상상하였을까. 어쩌면 일찌감치 풍영정은 시대의 변화를 예언처럼 꿰뚫어 보았다. 꽃잎이 떨어지고 나뭇잎이 구르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풍영정은 마치 범할 수 없는 호랑이의 앞발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켜냈다.     


풍암정 앞 들판에는 운암산, 대마산이 극락강과 함께 아늑하게 오래된 들판을 보듬는다. 먼 어등산은 황룡강을 만나 풍영정을 멀게 두른다. 그 안의 풍암정천은 어등대교에서 극락강과 만나 영산강을 향한다. 물길이 만나는 경관의 조화를 옛사람은 놓치지 않는다. 마치 풍영정의 느티나무가 숲을 조절하며 풍광을 열리게 또는 닫히게 하는 역할을 하듯이 풍영정 주변은 지금도 자연의 강건한 모습으로 가득하다.      


풍영정 정자마루에 앉아 오백 년의 세월을 간직한 옛사람들과의 만남을 느낀다. 풍영정이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역사와 시간을 품은 공간이기에 가능하다. 풍영정의 공간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변화의 시경(詩境)을 발견한다. 기막힌 경관으로 어우러졌던 풍영정이 도시 한가운데 급격한 경관의 변화 속에서도 의연하다. 자연과 문명,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의 풍경을 새롭게 형상화한다.   

  

칠계십영으로 16세기 풍영정 원림의 풍광을 살핀다     


당시의 풍광을 구현한 시경(詩境)으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칠계십영(漆溪十詠)」 집경시를 살핀다. 주변의 자연경관을 차경으로 끌어들여 드넓은 공간감을 부여한다.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광활함을 안겨준다. 김인후는 「소쇄원 48영」을 지어 소쇄원의 원형 경관을 후대에 전한다. 한국정원문화의 운치 있는 품격을 시의 경지로 설계한 ‘시인 조경가’이다. 풍영정 원림의 경관을 선창범주(仙滄泛舟), 현봉요월(懸峯邀月), 서석청운(瑞石晴雲), 금성제설(錦城霽雪), 월출묘애(月出杳靄), 나산촌점(羅山村店), 양평다가(楊坪多稼), 류시장림(柳市長林), 수교심춘(繡郊尋春), 원탄조어(院灘釣魚)로 열 개의 경관 요소로 읊었다. 돛단배, 달맞이, 맑은 구름, 처렁처렁한 눈, 자욱한 산기운, 평화로운 마을, 풍년 들판, 버드나무숲, 시 읊는 경치, 낚시 풍광의 열 가지 경관이다.  

   

풍영정 원림의 제1영은 ‘선창범주’이다. ‘선창에서 배를 띄웠다’는 의미이다. 원림 앞에는 극락강이 흐르고 강을 내려다보며 언덕을 이룬 곳이 선창산이다. 김언거가 광주 마지면(馬池面) 선창리(仙滄里)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이 현재 풍영정이 있는 곳이다. ‘선창범주’를 제목으로 한 7언율시는 신선의 세계를 노래한다. 정자 아래 깊은 물이 맴도는 풍담(風潭)이 있어 바람이 잘 돈다. 여름에서도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물안개 피어오르고 목련꽃 닮은 배를 띄우니 신선이 따로 없다. 학과 갈매기만 오간다. 원림의 주인인 선창의 늙은이〔仙滄叟〕가 곧 신선이다.      


제2영은 ‘현봉요월’이다. ‘우뚝한 봉우리인 현봉에 걸린 달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현봉은 칠계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운암산이고 대마산으로 비정한다. 달은 홀로 고요한 상태에서 자신을 관조하고 심신을 닦는 힘이 있다. 달과 함께 하는 풍류와 선계의 이미지를 풍긴다. 제3영 ‘서석청운’은 풍영정에서 ‘무등산의 구름이 걷히는’ 모습을 경관으로 인식한다. 용이 날고 호랑이 엎드린 무등산이 큰 안개와 만난다. 기세가 웅장하다. 제4영 ‘금성제설’은 나주에 있는 ‘금성산의 개인 눈’을 말한다. 신선의 궁궐인 ‘선궐(仙闕)’, 층층 누각이 12 황제 마을 같다고 하는 ‘층루십이제향청(層樓十二帝鄕淸)’의 표현에서 보듯 금성산을 신선의 풍광으로 끌어온다.

    

제5영 ‘월출묘애’의 ‘묘애(杳靄)’는 아득히 먼 자욱하게 낀 기운을 말한다. ‘월출산의 자욱한 산기운’으로 읽는다. 월출산은 풍영정에서 저 먼 남쪽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월출산의 풍경을 이덕유(李德裕, 787~850)의 평천장(平泉莊) 보다 뛰어나다고 한다. 각설하고 평천장의 사사로운 바위조각을 비웃나니〔却哂平泉私片石〕, 어찌 일찍이 살아있는 그림처럼 구름과 안개를 점유했겠는가〔何曾活畫占雲嵐〕라고 시경을 남긴다. 제6영 ‘ 나산촌점’은 ‘나산의 마을 가게’를 그렸다. 평화롭고 풍요로움 삶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시경이다.      


제7영 ‘양평다가’는 ‘양평의 풍년 들판’이다. 많은 곡식을 들먹인다. 배불리 먹고 노래를 부르며 풍요를 함께 즐기는 모습을 그렸다. 제8영 ‘류시장림’은 ‘길게 이어진 버드나무 숲’이다. 그러니까 풍영정 동쪽은 숲으로 가려졌다. 외부와 격리된 은일의 거처를 표상한다. 제9영 ‘수교심춘’은 ‘수놓은 듯 교외에서 봄을 찾는’ 다는 뜻으로 봄날의 풍류이다. ‘수교심춘’ 7언율시 ‘미련’의 두 수가 풍영정의 이름을 강조한다. “기수에서 천 년 전의 증점과 내가 한결같이 바람 쐬며 시를 읊조리니 흥취가 넉넉하다."〔沂上千年吾與點, 一般風詠興悠然”라고 김인후는 시경을 읊었다. 논어에서 공자와 증점이 나눈 대화인 ‘욕호기풍호무우영이귀(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에서 전거를 가져와 시의 완결성을 구축한다. 영남 제일의 동천인 수승대 원림의 관수루 입구 양쪽 바위에 새긴 욕기암(浴沂岩)과 풍우대(風雩臺)도 그런 연유이다.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풍영’이라는 명칭은 그래서 원림 경영의 보통 명사처럼 유통된다.   

  

광주 풍영정 - 호랑이 앞발처럼 웅크려 앉은 지형과 석봉 한호의 제일호산(2023.03.16.)


제10영 ‘원탄조어’는 ‘원탄에서의 낚시질’을 말한다. 세속을 멀리하고 때를 기다리며 세월을 낚던 강태공의 모습이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무심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시로 담았다. 「칠계십영」은 김인후 이후에도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풍영정 차김하서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차운김후지위김계진작칠계십영」이란 제목으로 「칠계십영」이 재창작된다. 이황과 김언거는 두 살 터울로 평생 친밀한 교유관계를 가진다. 서울에서 같은 마을에 세 들어 살았고 편지에서 안부를 묻곤 하였다. 김안거는 1552년, 이황에게 ‘풍영정시첩’을 보여주면서 차운시를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김언거는 헌납으로 있을 때이다. 이황은 풍영정에 직접 온 적은 없지만 앞사람의 시첩에 차운하는 형식으로 시를 지었다. 그 후 풍영정에 이황의 시가 걸린다.     


「칠계십영」으로 풍영정 원림의 원형 경관을 살펴보면, 선창산이라 불린 풍영정 정자 앞 극락강변으로 길게 이어진 버드나무 숲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긴 숲은 풍영정 원림을 깊고 그윽한 은일의 거처로 비밀스럽게 이끈다. 그리고 멀리 넓고 풍요로운 오래된 들판이 전개된다. 칠천이라 불리던 극락강에는 십여 리에 걸쳐 펼쳐진 모래톱이 여기저기 숲 사이로 반짝이며 단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정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으면 정자가 마치 강에 둥실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지닌다. 이러한 풍영정 주변의 풍광을 보고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호남 제일의 경관이라며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글씨를 남겼다.     


풍영정 원운과 차운시     


풍영정의 원운은 송인수(宋麟壽, 1499~1547)의 작품으로 여긴다. 풍영정 제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드러났다. 송순, 김인후, 임억령, 주세붕 등이 송인수의 운에 차운한다고 밝혔다. 송인수는 1543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풍영정에 들려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半日偸閒萬事休(반일투한만사휴) / 한나절 한가한 틈을 타서 모든 일을 쉬는데

天涯春色迥添愁(천애춘색형첨수) / 하늘가 봄빛이 아득히 시름을 더한다.

山圍遠近桃花洞(산위원근도화동) / 산은 원근의 도화동을 둘러싸 둘렀고

水散東西杜若洲(수산동서두약주) / 물은 동서로 흩어져 창포 피는 물가를 흐른다.

侍從久虛難痕迹(시종구허난흔적) / 시종이 오래도록 비워 자취 찾기 어렵고

林泉雖美莫淹留(임천수미막엄류) / 원림은 비록 아름답지만 오래 머물지는 말게.

白頭如我歸田晩(백두여아귀전만) / 백발의 내 모습 늦게야 전원으로 돌아가누나

張翰孤舟不待秋(장한고주불대추) / 장한은 외로운 배 가을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송인수, ‘제계진풍영정(題季珍風詠亭)’, 「규암선생문집권지일」, 『규암집』, 한국고전종합DB.    

 

풍영정 원림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한다. 속세를 떠나 은거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봄철의 풍영정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시름이 더해진다. 넓게 펼쳐진 봄의 경치가 울적한 마음을 불러온다. 신선이 사는 도화동을 에둘러싸듯 당시 풍영정 주변이 온통 산이다. 풍영정 원림에서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떠올린다. 원림 아래로 극락강이 동서로 흩어지면서 창포꽃이 피는 모래톱을 바라본다. 극락강 모래톱으로 창포가 많이 자라고 있었음을 시를 통하여 확인한다. 창포가 피는 모래톱을 두약주(杜若洲)라고 표현한 것이 독특하다. 휴수주류추(休愁洲留秋)를 원운으로 삼아 차운한 시가 계속 만들어진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광주의 월봉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 등을 지냈고 문헌(文獻)의 시호를 받았다. 기대승의 차운시로 풍영정 경관을 읽는다.


遊山羈客不能休(유산기객불능휴) / 경관을 보러 다니는 길손이 쉬지 못하다가

偶到仙滄一散愁(우도선창일산수) / 우연히 선창에 이르러 시름을 잠시 푼다.

風約林梢呈遠野(풍약림초정원야) / 바람 이는 숲 끝에 먼 들판이 나타나고

烟開波浪露長洲(연개파랑로장주) / 안개 개인 물결 너머로 긴 모래톱 드러난다.

塵埃只恨三山隔(진애지한삼산격) / 속세의 번잡함이 한스러운 건 삼신산이 가로막혀서이고

樽酒何妨半日留(준주하방반일류) / 술동이 함께하며 한나절을 머물렀네

人事悠悠難自了(인사유유난자료) / 아득한 인간세상 자력으로 마치기 어려우니

故應來賞待高秋(고응래상대고추) / 이에 응하는 상찬으로 맑은 가을 기다린다.      


기대승, ‘차풍영정운(次風詠亭韻)’ 「고봉속집 제1권」, 『고봉전서』, 한국고전종합DB.     


아무리 좋은 경관을 보러 다녀도 시름은 흩어지지 않는다. 선창산의 풍영정에서 바람과 숲과 들판을 주요 경관 요소로 읽는다. 바람은 숲 끝을 따라 멀리 들판을 드러내 보인다. 극락강의 긴 모래톱에서 안개와 물결을 만난다. 안개가 걷힌다. 물결 찰랑이는 사이로 긴 모래톱이 드러난다. 신선 같은 경개에 취해 쉬다 보니 속세의 직분을 놓지 못하는 처지가 한스럽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기필코 나만의 원림에서 정취를 사르리라.     

풍영정 현판 - '풍'자와 '영정'이 생경스럽다.(2023.03.16.)


김언거가 지은 풍영정의 현판 글씨에 대한 일화가 남다르다. 어렵게 시도하여 갈처사에게 현판 글씨를 받아오다가 궁금하여 미리 엿본다. 풍영정에 도착하여 펼쳐 보라고 했었다. ‘풍(風)’자가 날아간다. 다시 갔으나 황처사에게 받으라 한다. 그래서 ‘풍영정’ 글씨는 전체적 조화로 봤을 때 ‘풍’ 자가 생경스럽다.    


풍영정 원림의 번영기


풍영정 원림의 번영기를 「광주 풍영정의 문화사적 의의」를 참고하여 정리한다. 현재의 풍영정 원림에는 김안거의 둘째 형이 경영하던 청원정(淸遠亭)이 먼저 자리하였다. 1546년 창평의 성산으로 옮기면서 아우에게 주고 간다. 선창산 칠천 가에 형의 청원정과 아우의 풍영정이 나란히 경영된 셈이다. 이황의 「기제관포당(寄題灌圃堂)」이란 시를 보면 ‘관포당’도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언거의 아들 광부(光符)의 호가 관포당이다. 아들이 풍영정 원림의 공간을 유업으로 삼고 경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손자 치원(致謜)은 ‘수진당(守眞堂)’을 경영하였다. 수진당을 제영으로 시를 남긴 사람이 꽤 있다. 5 세손 정혁(廷赫)은 ‘죽와(竹窩)’를 경영하였음을 죽와를 제영으로 남긴 시로 확인한다. 6 세손 이려(以呂)는 ‘서루(書樓)’를 경영하여 서루에 시를 남긴 사람 또한 많다. 또한 9 세손 달생(達生)에게도 이곳의 정취를 써준 많은 시가 있다.      


청원정, 풍영정, 관포당, 수진당, 죽와, 서루 등 현재의 풍영정 원림 공간의 번영기를 상상한다. 물론 꽃이 피고 지듯이 누정도 짓고 바뀌고 다시 짓고 하였을 법하다. 충분히 그럴만한 공간의 규모를 가졌다. 한때의 최성기에는 원림의 풍모가 인근에서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기세를 뿜어낼 만하였을 것이다. 1776년 후손 김중엽(金重燁)은 『강호만영(江湖漫詠)』으로 풍영정 시를 모았는데, 여기의 끝부분에 “칠계에는 풍영정 위에 또 청원정, 관포당, 수진당을 지었는데, 역시 여러 명류들이 제영 하였으나 지금은 폐하였다."〔漆溪於本亭上, 又構淸遠亭灌圃堂守眞堂, 亦 俱諸名流題詠, 今廢〕라고 적었다. 김언거의 풍영정 원림은 세상과 인연을 끊는 수기의 공간보다는 뱃길로 물산이 움직이는 활기찬 공간이었다. 여러 사람이 찾아와 교류하면서 시경을 창작하는 개방의 공간이다. 수기치인의 장소에서 풍류를 즐기며 문우지정을 음미하는 원림문화의 산실이었다.  

   

근대에는 후손 기수(基洙)가 1898년에 중수하였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풍영정 중수기」가 전한다. 1922년에는 풍영정 옆으로 철도가 부설되는 시점에서는 『칠계집』을 발간하였다. 남긴 시를 모아 묶고 최근에는 『풍영정 시집』이라는 시집에 80여 편을 실었다. 광주에서 송정리 간 철도 개통에 따라 이곳 풍영정 원림 앞의 극락강은 여름이면 수영장으로 사용되었다. 학생의 여행 장소, 소년군의 야외생활로도 활용되었다. 심지어 피서객의 편의를 위하여 극락강 근처에 임시 정류소를 설치하여 일분 간 정차하고 운임도 50%를 할인한다는 기사를 읽는다. 풍영정은 오백 년의 시공간 내내 굴하지 않고 원림의 풍모를 유지하였다. 위기의 순간이면 ‘평천장의 고사’를 상기하며 원림을 보존한다. 정자에 걸린 시판은 어떤 누정보다 많이 걸렸다. 작자의 명성과 유려한 문장을 선별하여 걸었기에 풍영정 차운시를 대표한다. 오백 년의 원림 문화를 풍영정 시판으로 걸어서 기록한다. 이곳에 모여서 차담을 나누며 시를 쓰고 경관을 논하는 풍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정자 마루에 더 많은 사람의 훈기로 반짝거려 빛나기를 고대한다.    

            

(온형근, 시인::문화유산조경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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