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인터뷰어의 책임에 대해
1.런던베이글뮤지엄 노동자 사망 사건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최성운의 사고실험>(아래 <사고실험>)에서 봤던 창업자의 인터뷰였다. 평소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이었고, 그날의 콘텐츠도 오랫동안 벼려온 ‘자기만의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의 진정성과 단단함이 느껴지는 인터뷰였다.
2.노동자 사망 사건 이후 창업자의 책과 인터뷰는 다시 조명됐고 <사고실험>에 올라왔던 인터뷰는 아무런 공지 없이 비공개 처리됐다. 수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감동받았던 영상이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3.주말 사이에 <사고실험> 휴재 공지가 올라왔다. 최성운은 <사고실험>이 ‘띄워주기’용 콘텐츠라는 비판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전까지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저에게 호의를 갖고 영상을 시청해 주시는 분들의 신뢰를 사용하는 입장에서, 의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4. 인터뷰이에게 받았던 피드백 중 종종 생각나는 문자가 있다. “인터뷰에 나온 저는 참 좋은 사람 같네요. 아무래도 제 주관적인 주장을 근거로 작성됐으니 그렇겠죠”라는 내용이었다. 인터뷰이를 포장하거나 띄워주려고 작정하지 않더라도, 인터뷰는 근본적으로 인터뷰이를 ‘좋은 사람’으로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5. 이는 인터뷰가 인터뷰이의 말을 담는 매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터뷰어는 인터뷰이의 본질을 포착하는 사람이고, 그 본질은 대개 그 사람의 가장 좋고 빛나는 것일 때가 많다. 아니, 인터뷰어는 인터뷰이의 가장 좋고 빛나는 것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그래야만 독자와 공유할 수 있는 인사이트가 있는 인터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살아왔다는 것이 인터뷰의 주요 내용이 될 수는 없다. 인터뷰어는 인터뷰이 삶의 행간을 읽으며 밑줄을 치고 느낌표를 붙이는 사람이다.
6. 인터뷰하는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종종 악몽에 시달린다.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이 사실은 내가 몰랐던 치명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면 어쩌지? 내가 쓴 인터뷰 기사를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으니 책임지라는 항의를 받으면 어쩌지? 사람은 수많은 면을 갖고 있고, 나에게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끔찍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무리 나름의 검증을 거친다 해도 몇 시간의 인터뷰로 인터뷰이가 어떤 사람인지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인터뷰어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인터뷰어는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더 크고 멀리 들려주는 사람이기도 한데, ‘나는 몰랐다’라고 하면 그만인 걸까?
7.최성운은 ‘나는 이 일을 계속해도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면서, 이번 사안과 관련해서 가장 마음이 아팠다는 댓글을 소개한다.
‘한국에서의 성공은 대부분 착취를 기반으로 한다. 그 현실을 외면하고, 성공한 이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주며 우상화시키는 콘텐츠는 사기에 가깝다. 사고실험 또한 그렇다.’
8.'한국에서의 성공은 대부분 착취를 기반으로 한다'라는 문장을 계속 곱씹는다. 소위 ‘성공했다’라고 평가받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볼 때마다 나는 궁금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이 ‘착취’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착취도 포함돼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공 서사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함께 다루지 않는다.
9. 그렇다면 인터뷰이와 깊이 호흡하는 인터뷰어는 어떻게 '성공 이면의 현실'을 담아낼 것인가? 그런데 독자들이 정말로 차갑고 불편한 현실까지 궁금해할까? 이런 생각 또한 게으른 자기 합리화일까?
10. 최성운은 사고실험이 분명히 한계가 많은 콘텐츠이고, 자신 역시 그렇다고 인정하면서 채널을 정비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이 채널을 응원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의 다음 행보를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려 한다. 인터뷰라는 매체의 한계와 책임을 고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