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지 May 29. 2019

2-11. 서핑 비수기

계절별 파도



1.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둘이 즐겨보자, 하며

서핑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난 서핑과 같은 상황.

장판.


스탠딩,

앉아서 균형 잡기...

아는 건 다 해봤지만

연습 같지 않았다.

(아무리 심심해도 패들 연습은 안 한다.)


실수해야 배우는 법인데

실수할 기회가 없었다.



보드에 손 짚지 않는게 자랑거리였던 시절/ 하조대 서피비치/ 2016년 08월/ 출처: 내친구



몇 년 후에야 알게 되었다.

강원도를 주요 스팟을 삼는

서퍼들에게

여름은

존재하지 않는

계절이라는 것을.


강원도권 여름은

장판인 날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더위를 식히며

시원-하게 물살을 가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여름 내내 서핑을 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극성수기의 교통체증,

극심하게 오르는 물가...

무엇보다도

계속되는 장판 상태의 파도가 

여름 서핑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2.

이때는 정말

앞뒤 없이

서핑을 다녔던 것 같다.


'일단 연습하면 되겠지,

가보면 연습이 되겠지,

하다 보면 늘겠지...' 하며

바다로 향했던 것 같다.


파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예측해 볼 생각도 못해봤다.

자연은 그저

매일매일이 다른 존재,

알 수 없는 존재라고만 미루어 생각하고 말았다.


변화무쌍한 자연.

하지만 그것을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핑을 했다면

좀 더 일찍

실력이 늘었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없었던 것은

지금 돌이켜 봤을 때,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장판에 지친 친구/ 하조대 서피비치/ 2016년 8월/ 출처: 김은지



3.

친구와 나는 튜브가 아닌,

서프보드를 갖고 물에 떠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힘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점심도 어설프게 먹은 상태인 데다가

물놀이 자체도 힘이 드는 활동이라서

배도 고프고, 힘도 없는

불쌍한 상태로

일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사실상 서핑이 아닌 '물놀이'에 그친 날이었다.


해변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그러곤 사진도 몇 장 찍었는데

하루 종일 고생하던 나의 핸드폰은

마지막 배터리마저 방전을 알리며 전사했다.


서피비치의 식당에서

모히토 등을 먹으며 정신을 차렸다.

여름 해가 길 것 같았지만

노을 너머로 해가 금방 떨어져 갔다.



4.

밤이 시작되기 전에

속초항 근처의

'유람선'이라는 실내포차 같은 곳으로 이동했다.



속초 로컬(=내 친구) 피셜, 맛집이라고 했다.

홍게 무침을 적극 추천하길래 이걸 시켰다.


홍게를 매운 양념에 무쳐

먹기 좋게 다리를 도막 내오는 안주? 야식?이었다.


우리는 주류파가 아닌지라

홍게 무침을 밥 삼아 야무지게 먹었다.

눈물 나게 맛있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돌아가셔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 아쉬웠다.


원래 계획은

저녁 8-9시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지연된 일정과

홍게 무침에 정신이 나가

미리 예매했던 표는 취소했고

막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여름밤


나는 계획대로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정과 약속을 바꾸고 무시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속초항에서 풍겨오는 바다 냄새와

열기가 남아 있는 밤바람,

그 바람에 여유로워진 사람들의 풍경이

좀 더 속초에 남고 싶게 했던 것 같았다.


'여름밤이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도시의 들썩이는 밤이 아닌,

동 떨어진 밤도 아닌,

이런 여유가 느껴지는 밤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



5.

막차로 귀가를 미룬 것조차 아쉬웠다.

좀 더 속초, 양양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 여름밤의 감동을 간직한 채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컸다.


말로만 듣던 친구의 남자 친구가 등장했다.

터미널까지 데려다 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차를 몰고 나온 것이었다.


도착 때와는 다르게

'속초고속버스터미널'에서 떠나게 되었다.

이 터미널의 막차는

서울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경부)'로 향하는 버스였다.


새벽까지 버스도, 자리도 많다던 친구 말과 다르게

11시가 마지막 차였다.

좌석도 한 좌석, 맨 뒤에서 복도를 보는 자리 하나 남은 것이었다.

여름밤이고 뭐고

집에 못 올 뻔했다는 것에 좀 황당하기도 했다.


여기까지 데려다준

친구와 친구의 남자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버스에서 핸드폰 충전이 된다는 걸 알게 되어

재빨리 매점에 가

핸드폰 케이블과 간식도 사 왔다.


오전과는 다르게

고속버스는 막힘없이 달렸다.

맨 뒷자리의

승차감 제로에 시끄럽고 더운 상황에서도

쿨쿨 자면서 왔던 걸 생각해 보면,

그 날 참 고된 하루였던 건 확실했다.


자정 넘어 반포 터미널에 내리자

이번엔 유일한 교통수단인

택시를 잡아 타는 게 문제였다.

택시를 잡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니

내가 다시 서울로 왔다는 게 실감되었다.


그렇게

일주일 같던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버스를 오랜만에 탔더니 이런 충전기가 있는걸 처음 알았다/ 서울-속초 고속버스 안/ 2016년 8월/ 출처: 김은지






1. 다음 글, 2019년 6월 06일(목) 발행 예정.

2. Cover photo by Jack Antal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2-10. 안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