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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건의 서재 Oct 10. 2024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토요일 아침 8시. 아직 꿈속과 현실의 중간 어디쯤을 배회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스마트폰 화면이 켜지며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물밀듯이 이어졌다. 블로그 구독자를 자처하는, 그러나 송구하게도 생소한 이름들이 보낸 메일이었다. 메일의 제목은 대체로 이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부디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그동안 보내주던 글을 잘 읽었었는데…’,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되어 너무 안타깝다’… 초 단위로 새 메일이 앞의 메일을 갈아치웠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에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작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대비였다. 나는 기억의 흔적조차 없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 번의 심장 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같은 이유로 대학병원에서 정기 진료를 받는다. 간혹가다 가슴이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여느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증상조차도 내게는 꽤나 심각하게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괜찮을 거라고 다독인다. 술, 담배를 안 하고 정기적으로 심장 진료를 받으면서 관리하고 있으니, 건강하다고 자신하는 이들보다 오히려 안전할 거라고.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으로 불안감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인터넷 뉴스에 간간이 올라오는 심장 마비로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이들의 소식. 건물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마련된 심장 제세동기. 이런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에게도 죽음이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겠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나의 가족들, 나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애통해하며 나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추억하겠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따지고 보면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은 어차피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니까.


맞다. 평생 혼자 살기로 했다면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웬만큼 감당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지금까지 꽤나 잘해온 편이고, 살아가는 동안 다채로운 경험을 했으며, 살아보길 잘했다는 말을 스스로 할 정도는 되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 나를 닮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나에게는 이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괴리가 있을 때 인간은 고뇌한다. 내가 마땅히 완수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면? 상상조차 아찔한 그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잔인하지만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더 풍족하게 살게 해주고 싶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이미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최선인 바, 무엇을 어떻게 더 할 여지는 없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이유로 세상을 떠났을 때를 대비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동안 감사했다는 메시지를 남겨두는 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심장이라는 장기의 성격에 미루어 보건대, 정말로 급작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그런 말조차 전할 기회가 없을 테니 미리 고마운 마음을 남겨놓는다면 아주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향한 마음보다야 정도는 좀 덜하지만, 그 밖에 나와 알고 지내던 이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상호 간에 가깝게 알고 지낸 이들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일방적으로 나를 알고 있는 이들도 있을 터다. 그 방향과 성격이 어떠하건,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비록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떠나게 되었지만, 덕분에 잘 살다 갔다는 걸 알리는 게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말 그대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블로그에 써두고 발행 예약을 걸어두었다. 글은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는 이미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이 세상에서 내게 힘이 되어준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썼다. 그 글을 매주 월요일마다 그다음 주 토요일 8시에 발행되도록 예약을 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주 월요일이 되면 다시 한 주씩 예약을 연기하였다. 이 블로그는 매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지난 한 주간 글들을 메일로 보내게끔 해두었는데,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겨서 월요일에 다음 주 토요일 오전 8시에 공개될 글의 발행 예약을 연기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가 가장 최신 글로 구독자들에게 전달되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어느 월요일에 글의 발행을 일주일 연장해 두고 몇 분 뒤 불의의 상황이 닥친다면,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그다음 주 토요일에는 이 세상에 그 소식을 알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나는 내 아내에게도 별도의 이메일을 써서 블로그 글과 같은 시각에 보내지도록 예약 발송을 준비해 두었다. 불특정의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오직 나의 아내와 딸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이메일에 적었다. 그런 다음, 블로그 글과 마찬가지로 매주 월요일마다 그다음 토요일로 다가온 이메일 발송 예약을 일주일씩 연기하였다. 이렇게 블로그 구독자들에게 보여줄 글과 가족에게 보낼 지극히 개인적인 이메일로 이원화된, 내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가 준비되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평생 내 삶과 함께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근원적인 공포에 대한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아니, 자구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자구책이란 나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을 전제하고 준비한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나는 내 삶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글을 준비하였고, 이를 매주 뒤로 연기하길 반복했다. 삶의 유한성을 되새기며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들을 당연한 것이 아닌 귀중한 선물로 여겼다.


의도는 좋았다. 다만, 우리 인생이 늘 의도한 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일을 예상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오기 위해 준비함에 있어, 또 다른 예상치 못한 일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는 걸 간과했다. 찌는 듯한 여름을 보내고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이나 싶었던 이번 9월은 추석 연휴를 비롯해서 평소와는 다른 일정이 유난히 많았고, 그 와중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를 일주일 뒤로 미루는 것을 잊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9월 26일부터 27일까지 이틀 동안 제주도에서 있었던 전국 보건소장 교육에 참석하느라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그러다가 그다음 날 토요일 28일에 기어이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다시, 처음의 토요일 아침. 스마트폰 화면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이메일 알람을 뚫고 블로그 설정 창으로 들어가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글을 삭제하였다. ‘아차, 페이스북에도 자동으로 공유되었을 텐데.’ 재빨리 페이스북에 로그인해서 글을 삭제했다. ‘자, 이제 또 뭐가 남았지? 맞다!’ 아내에게도 이메일이 갔을 테니 이것도 조치해야 할 터다. 문제는 확실한 전달을 위해서 아내의 개인 이메일과 회사 이메일 두 군데로 보냈다는 거다. 아직 자고 있는 아내에게 아내의 스마트폰을 건네며, 다른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메일을 하나 보냈는데 그걸 지워야 하니 개인 메일함과 회사 메일함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단, 메일 제목을 보지 않았으면 하니, 로그인 버튼은 내가 누를 수 있도록 그 직전 단계까지만 준비해서 도로 달라고 했다. 아내는 이 인간이 또 무슨 엉뚱한 일을 벌였나 보다 하면서 별말 없이 스마트폰을 열어서 개인 이메일과 회사 이메일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는 다시 나에게 건넸다. 나는 곧바로 아내의 메일함 맨 위에 있는, 나의 메일 계정으로부터 자동으로 보내진 이메일을 삭제하였다. 그러고 나서 휴지통을 연 뒤에 지워진 메일을 확실히 삭제한 뒤 다시 아내에게 돌려주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2주 전 토요일 아침 8시에 마주했던 사건의 전말이다. 시작과 동시에 끝난 웃지 못할 촌극이었지만, 잠시 내가 사라진 세상을 지켜볼 수 있었던 기이한 시간이었다. 나의 부재는 뜻밖에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간 듯했다. 그럼에도 나머지 세상은 별일 없이 잘 굴러간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아에 과도하게 심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봐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오늘 하루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잊지 않고 매사에 좋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도 하였다.


이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같은 글은 준비하지 않을 생각이다. 메일 예약도 걸어놓지 않을 것이다. 그저 지금 주어진 이 날,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내가 가고 난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는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눈 감는 순간까지, 딱 거기까지가 내게 주어진 전부이고, 그 이후는 평가도 기억도 모두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메시지를 준비하기보다는 ‘지금’ 살아 있음에 감사하련다.


아, 당신이 내가 살아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이 블로그에 있는 글 어느 것이든 그 아래에 댓글을 달면, 그것은 항상 내 검토를 거친 후에야 공개된다. 만약 온건하고 상식적인 댓글이 달린다면 당연히 승인이 되어 이 블로그에 공개될 것이며, 그 과정은 보통 하루 이상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이 살다가 문득 나의 안위가 궁금해진다면, 그런데 이 블로그에 글이 한동안 올라오지 않는다면, 마음 가는 아무 글 아래에 댓글을 달아보라.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그 댓글이 공개된다면, 나도 당신처럼 주어진 삶을 힘껏 살아내고 있는 것일 테니.


원문: https://shinseungkeon.com/%ec%82%b4%ec%95%84-%ec%9e%88%ec%9d%8c%ec%97%90-%ea%b0%90%ec%82%ac%ed%95%98%eb%a9%b0/ | 신승건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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