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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건의 서재 Nov 25. 2024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놓인 아이들

연제구 소식지 11월 25일 기고글

성장호르몬 주사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특정 질병을 앓는 아이들을 위해 개발된 이 주사가 이제는 정상적인 키를 가진 아이들에게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2세에서 12세 사이의 아이들에게 성장호르몬 주사가 처방된 횟수는 약 25만 건이라고 한다. 전년 대비 무려 30% 이상 늘어난 수치다. 부모들은 자녀가 ‘키’로 인해 경쟁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봐 상당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성장호르몬 주사를 기꺼이 선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신체적 조건을 성공과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외모가 중요한 경쟁력이다. 그중에서도 신장은 한눈에 쉽게 확인할 수 있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 ‘키가 스펙이다’라는 말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런 세태 속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지켜보기보다 세상이 기대하는 신체 기준에 맞추려 애쓴다.


그러나 키는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선천적인 요소다. 연구에 따르면 키의 약 80%는 유전적으로 결정되며, 나머지 20%만이 영양, 운동, 수면 같은 후천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한 사람의 키는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성장호르몬 주사 역시 특정 성장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만 뚜렷한 효능이 있을 뿐, 정상적인 성장 경로를 가진 아이들에게는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상적인 아이에게 성장호르몬 주사를 투여하면 말단비대증이나 척추 변형, 관절 문제 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럼에도 키와 같은 타고난 조건에 큰 가치를 두고, 이를 위해 성장호르몬 주사까지 선택하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에 머물지 않는다. 성실함이나 열정,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정의 가치가 퇴색되고, 대신 한 가지 기준으로 줄 세운 조건으로 우열을 가리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해 시도하고 성공하기를 멈추고,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춘다. 마치 그리스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모두가 같은 틀에 맞도록 억지로 늘리거나 자르며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려받은 것보다 스스로 이루어낸 것을 높게 평가하고 그 과정에서 기울인 노력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얼마 전 수능을 마친 학생들은 긴 학창 시절을 뒤로하고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 있다. 이제 각자의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며 자기만의 성취를 이루어 갈 시간이다. 이들의 도전과 용기를 따뜻하게 격려하고 북돋워 줄 책임이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


원문: https://shinseungkeon.com/%ED%94%84%EB%A1%9C%ED%81%AC%EB%A3%A8%EC%8A%A4%ED%85%8C%EC%8A%A4%EC%9D%98-%EC%B9%A8%EB%8C%80%EC%97%90-%EB%86%93%EC%9D%B8-%EC%95%84%EC%9D%B4%EB%93%A4/ | 신승건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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