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 learned for a year.
직장인에게는 3, 6, 9의 고비가 있다고 한다. 3개월, 6개월, 9개월 혹은 3년, 6년, 9년이라는데 요즘같이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진 시대에는 전자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인의 1년은 더욱 의미가 있는 시간이다. 어찌 되었든 1년 정도는 되어야 경력을 쌓았다 인정받을 수 있기도 하고, 다른 의미로는 퇴직금이 생기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렇듯 나름의 이유로 1주년이라는 것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2019년 4월, 퍼블리의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입사해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격려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다짐의 의미로 회고를 꼭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퍼블리에서의 1년은 특히 더 각별하게 느껴지는 탓도 있다. 운이 좋게도 나는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거의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돈을 번다는 것 자체에 더 심취해 있었다. 사회에서 노동으로 한 사람의 몫의 대가를 받는다는 것이 그저 신기했고, 억압되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 심리 같은 것으로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기적인 계획은 나중의 일로 미루고 눈앞에 주어진 일들을 끌리는 대로 선택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앞자리가 바뀌면서 이제는 조금 더 지속 가능한 것들을 바라보며 계획을 세워보고 싶었다(그래야 한다고 느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인연이 닿았던 곳이 바로 지금의 회사이다. 그래서였을까. 그 어느 때 보다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리고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계속해서 생각해보곤 했다.
얼마 전에 발행된 동료의 아티클에 달린 독자 리뷰 중에서 공감 가는 내용이 있어 가져보았다.
저자가 길지 않은 직장생활 동안 아주 잘 깨어져 왔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잘하고 싶은, 그러나 특히 쉽지 않은 사회초년생들에게, 성공한 사람들의 공허한 ‘힘껏 부딪히세요’ 보다 ‘나는 이렇게 깨졌는데, 너는?’ 하며 탕비실이나 사무실 한구석을 작게 울리는 동료의 한마디가 위안이 된다.
지난 1년은 내게도 비슷한 시간이었다. 마치 ‘나’라는 한 개인을 재정의하고 새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았다. 조금의 과장을 보탠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조각내어 다시 맞추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속해있는 조직, 그리고 함께하는 팀원들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퍼블리 또한 성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기존의 것을 송두리째 바꾸더라도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진 조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일정이나 시간, 태스크를 관리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창의적인 일에는 시간이 정비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세부적인 계획을 짜는 데 드는 시간이 오히려 낭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틀린 생각이었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가 말하기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 관리할 수 없는 것은 개선할 수도 없다'라고 했다. 정확한 측정을 통해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창의적인 일의 결과물이 시간에 정비례하지 않다면 어찌 되었든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을 더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그리고 창의적인 일에 집중하기 위해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간을 치밀하게 관리할수록 내가 유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시간이 부족하고 해야 할 일이 많을 때 가장 하기 쉬운 실수는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처리해야 하는 일(혹은 할 수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닐 수 있다. 주로 그런 일들은 notifications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메일과 슬랙, 그 외 각종 푸시에 답하는 대응적 업무는 나중으로 미루고 중요한 업무가 무엇인지 파악한다. 그리고 확보한 덩어리 시간을 가장 중요한 문제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도록 먼저 사용해야 한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만의 일정 관리 루틴을 만들었다. Clockwise와 Toggl 등의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일정에 따른 시간을 계획하고 측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출근하고 나면 구글 캘린더에서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Focus Time을 확인한다. 그리고 크고 중요한 일정부터 작성하고 사이 사이에 나머지 일정들을 끼워 넣는 식으로 중요도에 따라 예상 시간과 순서를 조정한다. 계획된 일정을 진행하면서 실제 작업 시간을 트래킹하면 퇴근할 즈음에는 하루 성적표를 받아볼 수 있다. 계속해서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하고자 했다. 그 결과, 점진적으로 평균 작업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이전보다 1~2시간 이상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루틴이라는 것은 근육과 비슷한 것 같다. 계속 단련시킨 근육도 오랜 시간을 쉬면 다시 관성적으로 돌아간다. 꾸준히 자주 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내 경우, 루틴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루틴에 쉬는 시간이나 보상 시간을 중간중간 넣는다.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은 최대한 작은 단위로 쪼갠다. 마치 체크리스트를 지워나가는 것처럼 계획된 일정을 하나씩 처리한다. 날마다 해낼 수 있는 작은 승리들을 만들어두는 방법이다.
스타트업에서 속도는 정말 중요하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빠른 실행은 단순히 태스크를 짧은 시간에 끝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칫 급하게, 빨리, 대충 대충이라는 표현이 떠오르지만, 그것보다는 같은 시간 안에 임팩트 있게 일하는 것이라 이해하면 쉽다. 주어진 시간 동안 더 많은 것을 하기 위해 속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린 스타트업 방법론에서는 MVP를 Minimum Viable Product 뜻으로 이야기한다. 이는 최소한의 기능만 구현한 제품을 말하는 것으로 적은 노력으로 고객의 니즈를 검증하기 위해 주로 사용한다. 프로덕트를 만드는 조직에서 신규 사업을 맡으면서 정말 지겹도록 듣고 또 말하게 되는 개념이다. MVP가 중요한 이유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에 매달리느라 리소스를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스타트업에서는 낭비할 수 없다는 것이 더 맞겠다. 실험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할 때가 더 많다. 따라서 최소한의 리소스를 투입해 실패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린하게 일한다는 것의 핵심은 '러닝할 수 있는 만큼만 만든다'이다.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scope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완성도와 빠른 실험의 중간 점을 찾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마음이 계속 속삭인다. '그래도 이 정도는 있어야 사용자가 서비스를 이해할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실험에 필요한 한두 개의 핵심 기능이 완벽하게 동작하는 정도라면 괜찮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이동 수단을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바퀴 → 프레임 → 외형의 순서로 만드는 것보다 당장 이동이 가능한 바퀴 두 개 달린 보드 → 킥보드 → 오토바이 이렇게 단계적으로 스케일 업해가는 것이 MVP를 만드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그저 구색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늘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도 어렵다면 일단은 본인이 생각해도 부족한 상태로 내보고 확인해보자. 대체로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지난 5월 초, 앞뒤로 휴가를 붙여 6일을 쉬었다. 마침 가정의 달이라 고향에도 다녀왔다. KTX로도 꼬박 3시간이 걸리는 터라 그동안 쓰고 싶었던 글도 쓰고 밀린 책도 읽었다. 남는 시간에는 앞으로의 미래 계획도 세워보았다. 문득 '평소에는 왜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갑자기 무언가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어 태도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것저것 둘러보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틈이 생겼다는 것이 더 맞겠다. 평소보다 잠을 더 자고 행동에도 여유가 생기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가 생겼다.
'루틴의 힘'이라는 책에서도 보면 루틴에는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미 지친 상태로 일터에 도착한 뒤 본능적으로 단순한 일을 처리하는 데 에너지를 쏟았다. 그러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것은 당분을 과하게 섭취해 흥분 상태가 되는 '슈거 하이'와 동일한 현상이었다. 단순한 일을 여러개 처리하고 나면 만족스러워졌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몸은 바쁘고 뭔가 많이 하긴 했는데 마음은 개운하지 않은 날, 위에서 말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그런 날이다. 항상성, stable 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직장인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지만 일하기 좋은 컨디션을 항상 유지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신체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적절하게 쉬어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책에서도 하루 중 회복 시간을 확보할 때, 즉 올바른 생활 리듬을 확립할 때 인생의 모든 일이 더 잘 풀린다고 한다.
이번 휴가를 계기로 체력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깨닫게 되었다. 기분을 마음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도 몸이 피곤하지 않을 때나 할 수 있다. 열정도 육체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반복되는 출근과 업무 속에서 멘탈이 바스러지지 않도록 적절한 빈틈으로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비슷한 마음으로 작년 11월부터 요가를 하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두 번은 빼놓지 않고 가려 한다. 특히 요가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단련하기도 좋은 운동이어서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요가에서는 큰 흐름 안에서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다고 한다. 수련의 마지막에는 항상 5분에서 10분 정도 사바아사나라는 자세를 한다. 사바아사나는 큰 대자로 누워 근육을 이완하는 시간이다. 언뜻 보면 그냥 누워서 쉬는 것 같지만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온몸 힘을 빼려고 노력하면서 수련을 통해 쌓은 에너지를 차분하게 저장해야 한다. 휴식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정신없이 선생님의 지도에 몸을 맡기다 보면 수련으로 늘어난 몸의 공간 만큼 마음에도 너그러움이 채워진 것만 같다.
회사에서 드라이버 검사라는 걸 한 적이 있다. 드라이버는 개인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무의식적 내적 압력을 말하며 BP(Be Perfect, 완벽하게 하라), BS(Be Strong, 강하게 하라), PP(Please People, 타인을 즐겁게 하라), TH(Try Hard, 열심히 하라), HU(Hurry Up, 서둘러 하라)의 5가지의 모형이 있다. 점수가 높은 순으로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어떤 성향이 발현되는지를 나타낸다. 검사 결과, 나는 BP → TH → BS → PP → HU 순으로 나왔다. 이 중에서 BP의 성향이 가장 높기 때문에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업무를 할 때도 완벽하게 하는 것을 추구하려는 성향이 크다고 한다.
사실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이 평소 장점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스타트업에서는 이게 마냥 장점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빈틈없이 해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욕심을 부리게 되는 순간 문제가 된다. 매 순간 흠이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는 없고 리소스는 늘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게 시간이든 체력이든. 균형 있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스타트업에서는 속도가 정말 중요하고, 늘 효과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세부적인 디테일을 따지기보다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끊임없이 본질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려면 어느 수준까지 하면 좋을지 일의 기준을 분명하게 해두어야 한다.
지난 1년은 개인적으로 매우 챌린지했고 힘에 부칠 때도 많았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포기해버리면 비슷한 상황에서 여전히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답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어떻게든 결론을 마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왔다. 그러다 보니 1년이 지났다. 무엇보다 성장할 수 있는 시기에 성장하는 조직에서 일하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 지금도 함께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팀의 일원으로 일을 한다는 것에 큰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