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토스에서 책을 냈다고 한다. 괜히 질투가 나서 읽지 않으려 했지만 하도 눈에 띄니까 궁금했다. 실물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웹사이트에서 재고를 몇 번씩 확인했다. 한나절을 꼬박 고민하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영풍문고가 있는 왕십리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마감을 5분 남기고 책 ‘유난한 도전’을 손에 얻었다. 기왕 이렇게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긴 아쉬우니, 영화나 한 편 보기로 했다. 우리가 고른 영화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가 시작하길 기다리면서 책을 들춰보았다. 이야기는 토스가 세상에 나오기 전, 이승건 대표의 고민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개원을 앞두고 있던 이승건 대표는 본인이 진짜 원하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이 소개된다. 그중 한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중략) 여러분이 진정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만일 인생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면 뭘 할 거야?”
영화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남편에게 물었다.
“글쎄, 무얼 하기에 한 달은 너무 짧지 않나..아마도 평소와 다름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걸 싫어하지만) 정말 INFP다운 대답이었다.
“당신은 뭘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스크린에서는 이미 오프닝 시퀀스가 나오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한 통에 미처 대답은 하지 못했다.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영화관의 불이 켜졌다. 영화는 듣던 대로 좋았다. 재미있었던 건 스치듯 시작 전에 던진 질문이 영화의 메시지와도 이어지는 듯했는데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 오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책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을뿐더러 영화를 볼 거라고도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책과 영화가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줄여서 에에올라고도 하는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다중우주를 배경으로 한다. 다중우주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 외에도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주인공인 에블린이 살면서 마주한 선택지 중, 고르지 않았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시나리오들이 각각의 다중우주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셀 수 없이 많은 다중우주에 또 그만큼 다양한 에블린이 존재하는 셈이다. 에블린에게는 버스 점프라 부르는 기술을 이용하여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또 다른 에블린의 능력을 끌어와 악을 물리쳐야 한다는 미션이 주어진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본인이 고르지 않은 선택으로 만들어진 미래를 경험한다. 그리고는 현실과 비교하고 후회한다. 물론 영화가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작 에에올을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영화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책과 영화로 빙빙 돌려가며 하고 싶었던 자기 고백을 해본다.
완벽주의 형 인간인 나는 늘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았다. 자신이 없을 땐 선택을 미뤘다. 최고의 시나리오를 만들지 못할 거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나중에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기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미룬다는 건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모든 것에는 타이밍이 있기 때문이다. 이걸 크게 깨닫는 순간은 이사할 때다. 채 쓰지도 못한 물건을 포장도 뜯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로 선물 받은 화장품 같은 것들이 그렇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쓰고 싶어서 아껴뒀다가 결국 사용 기한을 넘겨 쓰지도 못하고 버리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도 비슷하다. 물질적으로 더 여유로워지면 때가 오겠지 하고 미루다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지킬 수 없는 약속만 덩그러니 남아 버리기도 했다. 다음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그랬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셀 수 없이 많은 선택지를 마주한다. 자유의지로 그중 오직 하나만을 고를 수 있다. 서로 다른 선택이 불러오는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중우주는 물론이고 과거나 미래로 갈 수도 없다. 적어도 지금 사는 현실에서는 그렇다. 탄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직진의 길을 헤쳐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선택을 경험한다. 지금의 선택이 최선일지, 다른 옵션이 더 나았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나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미루기를 멈춰야 한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방금의 선택이 최고의 결정이 될 수 있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건넨 질문의 실상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만일 인생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면 뭘 하겠느냐고. 그리고 이미 나는 답을 알고 있다. ‘아직 잊지 않았지?’ 하고 경각심을 주고 싶었던 거다. 진짜 원하고 있으면서 제쳐두고 있었던 일이 뭔지 기억해야 한다고.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미루지 말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5점 만점을 준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그 모든 곳에서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될 수 있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