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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땡땡 Nov 16. 2024

수필 둘_구석구석 덕지덕지


“형, 이거 형이 한 거 아니죠?”


 아내가 친정을 간 틈을 타, 집들이에 초대한 ‘훈’이 내게 물었다. 함께 온 ‘리자’도 집이 너무 예쁘다고, 자기 마음에 쏙 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집들이 선물이라고 손에 들고 온 LP를 받아 들고 네모난 공기청정기 위에 세팅 된 턴테이블에 사뿐히 안착시키고는, 냉장고를 열어 얼음을 쨍그랑 담곤 ‘아아’ 두 잔을 내려 아일랜드 식탁에 놓았다. 7년 전 러시아에서 나를 만났던 친구들은 지금의 내 처지가 그때와 너무나 달라 졌던 탓인지(난 러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기숙사에 살았다.), 이곳저곳 구석구석 뽈뽈거리며 휘둥그런 눈으로 구경하다가 이내 준비된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처음 우리가 집을 구경했을 때, 아내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집 가격도 등골이 휘겠는데 인테리어 비용까지 더하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던 나는, 있던 그대로도 그럭저럭 괜찮다고(사실, 내가 그동안 살아 본 그 어떤 곳들보다 좋은 상태였다.) 생각했지만 아내에겐 정확히 ‘절대 이대로 살 수 없는 집’ 이었다. 아마 점수로 표현하자면 10점 만점 중에 2점과 1점 사이 어딘가 쯤 되지 않았을까. 자연스럽게도, 집 계약이 성사된 후 아내는 그 누구보다 분주히 움직였고, 근 2년간 봤던 모습 중에 가장 열정적이고 바빠 보였다.


 우리가 함께 발 품 팔아가며 며칠을 고민하며 골랐던 혼수 가전제품들과 어떤 벽지가 어울릴지 고민하기 시작했던 아내는, 인테리어에 꽤 스트레스를 받는 듯 했다. 흰 색은 때가 너무 쉽게 탈 것 같고, 베이지 색은 새 집도 헌 집처럼 보이게 할 것 같고, 어두운 색은 가뜩이나 큰 평수도 아닌 집이 더 좁아 보일 것 같았다. 말이야 쉽지, 벽지 하나 고르고 나면 이어서 선택해야 할 항목이 수두룩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어차피 쳇바퀴 도는 회사 일을 핑계로 인테리어에는 크게 관여할 수 없었고(꼭 일 때문만은 아니다.), 세기의 전염병으로 인해 요즘 일이 부쩍 줄어든 아내가 홀로 인테리어 업체들을 만나 이 모든 사항들을 결정하고 협의해 나갔다. 그렇게 문 손잡이 색깔 하나, 욕실 타일 소재 하나 신경 쓰며 아내는 끝내 두 달여 만에 우리 집을 준비시켰다.


 처음 집에 들어와서 같이 짐을 풀고, 청소를 했다. 그리곤 씻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싱크대 옆 구석진 공간에 작은 쓰레기통의 거취 문제로 티격태격하고, 드레스룸에 새로 주문할 시스템 행거를 위해 줄자로 방 사이즈를 실측하고, 주말에는 대형마트에 가서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한가득 실어 왔다. 열어둔 방과 거실의 창문들 사이로는 저녁 바람이 살랑 불어왔고, 자석으로 만든 외창 청소기로 닦은 거실 샤시에는 늦 여름 노란 햇살이 반짝반짝 했다. 다시 씻고, 밥을 먹었고, 잠을 잤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우리 집은 만들어져 갔고, ‘훈’이 내게 이 집에 대해 물었을 때는 이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흘러갔다. 그래서인지 아내의 그 고단함에 조금은 웃음이 났다.


 계절의 지나감이 살갗으로 직접 닿게 되는 날이 종종 있다. 공기가 가벼워지고, 살갗이 찬 바람에 타는 듯한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 즈음, 생각지 못했던 계절의 변화에 문밖의 삶이 왠지 더 외로워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때에 나는 집에 돌아와서야 마침내 더 확실하게 느낀 것 같다. 외국에서 홀로 지낼 때는 느낄 수 없던 집의 따스함과 안락함을, 사람의 온기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하는 집안 구석구석에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아내의 애정과, 허구한날 지지고 볶는 우리의 추억들 덕분이라는 것을. 우리 집에 나의 아내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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