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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봅 Feb 25. 2020

일상을 위하여, 날씨 즐기기

 비가 온다. 

모를 땐 괜찮았는데,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괜히 마음이 울렁울렁거린다. 괜히 음악을 틀어 놓았고, 또 괜히 커피 한잔을 진하게 내렸다. 거실 커튼은 활짝 열어 놓고 떨어지는 빗줄기를, 난간에 붙어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들여다본다. 


이상한 건, 나는 딱히 비 오는 날에 얽힌 특별한 사연 따위 없는 사람이란 것이다. 이건 어쩌면 수많은 미디어에 노출된 관계로 학습된 기분일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게 고독해야 할 것 같고, 울적해야 할 것 같고, 이별노래를 듣거나 지나간 인연을 아쉬워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런 기분이 들면 지나간 옛 연인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쩌면 당연한 순서일지도 모른다. 햇빛은 없지, 음악은 잔잔하지, 괜히 커피도 한잔 내려 마셨겠다, 이렇게나 감상적인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었으면서 그런 생각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하다. 


 어땠더라? 아주 특별한 사연은 없어도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아니 어렸고. 사소한 것들에 즐거워했고, 그래서 행복했고, 그 사람이랑은 부산의 해변을 걸었었다. 작정하고 간 여행이었는데 비바람이 몰아 쳐서 사진은 제대로 찍지도 못한 데다 딱히 갈 데도 없어서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멍하니 앉아 있다 나왔던 게 떠오른다. 그래도 그게 뭐라고 깔깔거리며 행복했었다. 그러니 특별할 것 없는 그 날의 온도, 비가 오던 풍경, 휘몰아치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내 머리카락이나 우산 하나로 둘이 아웅다웅하던 것들이 다 떠오르는 게 신기하다. 


 날씨는 매일 반복되어 나타나는 자연현상일 뿐인데,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해가 쨍한 날에는 괜히 기분이 들뜨거나. 비가 오는 날, 혹은 눈이 내리는 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거나. 추운 날 코 끝을 시리게 만드는 공기에 얽힌 기억, 후후 불어먹던 호빵, 어렸던 때에 엄마손을 잡고 걷던 동네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묻어놓고 살던 기억의 파편은 어느 날 저도 모르게 훅 하고 머릿속을 치고 들어 와 그때의 감각을 되살려 놓곤 한다. 그래서 선호하는 날이나 싫은 날씨가 생기기도 한다.  


 나는 대체로 모든 날씨를 좋아한다. 맑으면 맑은 대로 어린 시절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길을 올라 아이스크림을 사 먹던 때가 떠오르고, 비가 오면 괜히 센티해지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바람이 불면 시원해서 좋고, 추우면 추운대로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훅 느껴지던 온기가 떠올라 행복하다. 뜬금없지만, 눈 오는 날엔 퇴근 후 요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사 먹은 카페라테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언젠가는 어느 비 오는 날 괜히 센티해져서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다 노트북을 켜고 글을 썼더라며 오늘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오늘의 날씨, 오늘의 음악, 오늘 마신 커피의 향을 생각하며 그때 참 좋았지-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이상한 건, 내 삶이 온통 행복으로 점철되어 있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면 온통 행복한 일들만 수두룩하게 떠오른 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날씨나, 사소하게 반복되는 나날이나, 매일 보는 풍경들이 '그래도 그때 나름대로 괜찮았어' 하며 떠오른다. 


 그러니 오늘을 즐기자. 좋은 일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시간은 오늘을 그래도 나쁘지 않게 바꿔 줄 것이다. 


 오늘은 비가 오니, 비 오는 날의 추억을 하나 더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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