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4월
언제부터인가 ‘친구’라는 주제로 이야기 꽃이 피워질때면, 주변 어른들로부터 인생에서 친구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만남의 수는 점차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듣곤했다. 어렸을 때엔 이 말들이 너무 차갑게만 느껴졌었다. 특히나 중고등학생 시절엔 하루 중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이었기에, 당장에 눈앞에 있는 친구들과의 관계는 인생에서의 최대 고민거리였다. 대게 '저 친구가 맘에드는데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라기보단 '혹시나 저 친구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라는 고민류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시기에 어른들은 점차 친구들의 수는 줄어든다고 하니 이해도 안되고 믿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당시엔 내게 친구가 한명도 남지 않게된다면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다.
중학교를 들어서면서 부터 친구에 대한 개념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창 즐겁게 놀았었을 초등학교때의 친구들을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떨어지는 경험을 해보며, 평생 볼 것만 같았던 사이가 잠시 멀어져도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친구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니였고, 대학생이 되고 그제서야 친구의 수보다 밀도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 한 학급에서 많아도 30명정도였던 중고등학생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100명에 가까운 대학동기간의 관계를 모두 다 신경쓰기엔 내 체력과 마음이 충분하지 않았다. 서른이 된 지금, 나에게있어 ‘친구’란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사실 나이를 서른만큼 먹는다고 해서 크게 어른이 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친구들 옆에 있을땐. 다들 사회속에서 어른의 흉내를 내고 있다 잠시 모이기만하면 어느새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때만큼은 영원히 늙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최근에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식에 갑작스런 동창회를 하게되었다. 고등학교 때 유난히 친할 수 밖에 없었던건 전 학급에서 유일하게 2년간 같은 반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과를 선택한 후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 우린 2가지 과목을 고른 후 수능을 준비해야 했었는데, 한 반 밖에 되지 않는 30명 정도가 지구과학을 선택하는 바람에 2년 내내 30명은 같은 반을 보냈어야 했다. 1년만 같은 반을 해도 친해질텐데, 2년이나 보낸 친구들이란 죽마고우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 고등학교 3학년때엔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중 한 친구가 결혼을 한 덕에 오랜만에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처음엔 살짝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어서 일까? 아무래도 평소 보지 못한 양복차림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결혼식이 끝나고 카페에 앉은 순간 비슷한 양복차림은 어느새 교복을 입은 것 같았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모두들 고등학교때 모습에서 달라진게 없다며 농담을 하니, 친구들도 속으론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참 한결같다. 고등학교 이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성격들이 어디 가진 않았다. 뒤이어 “고등학교 때 난 어땠어?”라는 질문에 한 친구는 나에게 “아줌마”라고 답했다. “아줌마…?” 아맞다. 내별명. 고등학교 2학년부터 3학년 내내 친구들은 날 아줌마라 불렀다. 돌이켜보면 친한 친구들만 있으면 수다를 떨기를 좋아했다. 별 것도 아닌것도 세상 심각한 주제들도 실컷 떠드는 편이 운동을 하는 것보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성격이었다. 이런 수다스러운 모습일까? 아니면 친근한 모습? 또는 푸근한 모습.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괜시리 응답하라 1998의 라미란여사가 떠올랐다. 아.. 혹시 오지랖일려나?
아무래도 내가 이렇게 수다떠는 것을 좋아하는 건 지인과 현재의 영향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함께있을 때 마음이 편한 두 친구들이 떠드는 것만 봐도 마음에 안정감이 왔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둘의 이야길 듣고만 있어도 느껴지는 소속감과 즐거움. 어느새 나름 무거운 주제로 이야기를 하기도하는 나이가 되었다는게 새삼 놀랍지만, 여전히 만나기만하면 별 것도 아닌 걸로 떠드는 재미가 있다. 그때부터 이 친구들 덕분에 부족했던 사회생활능력이 많이 성장했음을 고백한다.
힘든일이 생기면 잠시 굴속에 들어가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숨죽이고 호흡을 가다듬어질때까지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그럴 때면 친구들로부터 잠시 마음의 문을 닫고 형식적인 대화만을 해가며 생존신고만을 하는 편이다. 햇수로 20년이 가깝에 친구들을 봐왔음에도 아직까지도 어려운것은 시끄러운 속마음을 내비추는 것이다. 나의 부정적인 마음들이 표현되었을 때, 혹시나 친구들에게 영향을 주진 않을까 걱정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든 힘든 것들을 하나하나 해결하고나선 그동안 연락을 못했던 친구들에게 슬쩍 말을 걸어 기다려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을 표현한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몸과 마음도 지쳐 아무것도 할수 없을 때 잠시 숨어 있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 중 가장 하기 쉬운 것이었기에 이러한 비겁한 방법을 썻었다. 30년의 인생에서 크게 힘들었던 일들이 발생할때마다, 굴속에 숨은 나를 기다려줬던 친구들이 너무나도 고맙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생까지 학교를 오래다니는 바람에 늦은 저녁 주변엔 항상 친구들이 존재했다. 게다가 기숙사 생활을 고등학교때부터 했으니, 늦은 밤까지도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많았다. 특히 대학교 친구들 중 가장 친한 친구들은 기숙사 생활을 함께한 같은학과 친구들이었다. 대부분 다 타지에서 온 친구들이었기에 평일엔 항상 붙어다니다시피 지냈었다. 밤이면 밤마다 한친구의 기숙사에 모여 과자와 맥주 한캔을 하기도 하고, 시험기간엔 내내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다 모두 3학년이되어 기숙사를 나오게 되었을 땐, 월세비를 아끼기위해 두 세명씩 뭉쳐 함께 자취를 했다. 서로 지겹도록 봐온 녀석들이지만 충분히 서로를 알고 지내왔기에 불편한 부분보다는 함께있는 재미를 택했었다. 동시에 군대를 가지 않은 덕에, 한명씩 돌아가면서 함께 자취를 했었다. 방값을 아끼는 대신 야식비를 더 쓴것 같기도 하지만, 불타는 청춘시절을 그 친구들과 보낸 시기가 행복했던 추억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러나 요즘은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부터 친구들의 소중함이 확 느껴졌다. 평생 가본적도 없는 곳에 자취방을 구하고 지내다보니, 저녁이 되면 외로움이 찾아왔다. 그래도 가끔 온라인 게임 덕에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놀기도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물론 친한 회사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향이 퇴근 후의 만남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에, 온전히 혼자 지낼 수 있는 저녁을 보내는 편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번개로 잠시 불러내 맥주캔을 부딪히며 하루 중 힘들었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대학생 시절이 그립다.
그런데 최근, 대학생활 한 때 함께 자취를 했던 친구가 같은 부서로 입사하게 되었다. 사실 회사에 친구가 들어온다는 것에 대해 주변 회사 사람들이 혹시 편견을 갖게될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뻤지만 아직까지는 회사 내에 그 기쁜마음과 대학시절내내 절친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비밀로 두고 있다. 평소에 막역하게 지내던 친구와 연구실 내에서는 존댓말을 쓰는게 아직은 어색하긴 하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 가끔 회사에서 힘든 일들이 생길 때면 친구는 옆에서 슬쩍 다가와 도와주곤 한다. 눈만 마주치고 말없이 고개만 서로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아쉽게도 현재 대부분의 친한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서로다른 지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친구들과 가끔 전화를 할때면 친구들 역시도 멀리 있어서 아쉬운 마음을 표현한다. 그나마 일년에 한번씩 매달 조금씩 모은 돈으로 여행을 가고 있기에 추억을 만들어 나가고는 있다. 역시나 어렸을 때 어른들이 말했던 것처럼 점차 친구들의 수는 줄어들고, 만나는 횟수 또한 줄어 들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음을 몸소 체험하고 있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줄어들지 않음을 알고 있다. 자주 못보더라도 20년이고 30년이고 다들 건강하게 지내서 꾸준히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