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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희 Aug 02. 2023

소소하고 위대한 할아버지 이야기

그냥 문득 이 시대에 살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대화를 기록으로 남겨두다 보니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나오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서 나열해 본다. 

일명 할아버지 티엠아이. MSG가 많이 쳐져있을 수 있음.



1. 나는 할아버지가 반주라도 걸치는 날엔 할아버지 대학시절 썰을 들어야 했는데, 여러 개가 있던 것 같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다. 때는 할아버지의 시험 전날. 룸메이트에게 N시까지 당신이 잠을 청할 테니 N시에 나를 깨워줘라, 했는데 잠을 깨워준 친구는 붙고, 당신은 떨어졌다는 이야기. 당신은 5시간 잤기 때문에 떨어졌고, 친구는 할아버지를 깨워주기 전까지 공부를 하고 4시간을 잤기 때문에 붙었다고 했다. 그렇다. 속담 그대로 사당오락(四當五落)이다. 무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들은 할아버지의 시험썰

사당오락四當五落
[한자 뜻과 음] 넉 사, 해당할 당, 다섯 오, 떨어질 락. 
[풀이] 네 시간을 자면서 공부하면 당선이나 합격이고, 다섯 시간을 자면서 하면 낙선이나 불합격이라는 말.


2. 나는 어화둥둥 우리 집안 큰손녀딸. 가장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가장 할아버지의 사랑과 가르침을 많이 받은, 동시에 소위 '사랑의 매'를 가장 많이 맞은 아이인데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로 뒷산에서 회초리를 깎아왔다. 꺾어 와서 깎았는지 깎아왔는지 하여튼 30cm가 넘는 길이의 회초리가 우리 집에 있었다... 아무리 울고불고 숨겨도 할아버지는 새벽마다 산에 오르시기 때문에 또 새로 생겨서 한때는 할아버지가 산에 가는 게 너무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3. 위에 말한 것처럼 할아버지는 새벽마다 산에 오르셨다. 새벽 4시에 나가서 걸어 20-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산에 갔는데,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가끔 기분이 좋으면 나도 함께 가겠다고 때를 써서 함께 갔다. 산을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었고 나는 깨발랄 어린이 었을 테니 할아버지는 그냥 허허하고 나를 데려가셨을 거다. 나는 특히나 산을 내려와 할아버지가 사주는 시장표 칼국수나 편의점에서 파는 메추리알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4. 산을 가겠다는 의지가 과했을 때가 있었다. 내가 6-7살 즈음, 갑자기 해가 다 지고 난 저녁에 산에 가겠다고 징징거렸다. 왜 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가자고 계속 졸랐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난감함이 기억난다. 결국 할아버지는 나를 산 입구까지 데려갔는데, 난 거기서 유령들이 둥둥 떠다니는 걸 봤다. 그리고 한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말 그대로 어린이의 객기. 입구컷이었다. 메추리알이 먹고싶었나? 



5. 여름방학 때 숙제로 나뭇잎을 주워오는 게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생물 선생님은 단연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산 아래에 갔다. 할아버지와 쭈그려 앉아 떨어진 나뭇잎과 낮게 자란 식물들을 보면서 산 아래는 참 시원하구나 느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그때 그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탔다. 여전히 시원했다. 



6. 할아버지는 엄하면서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할머니에게 평생 구애를 펼쳤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다시 태어나면 할머니와 또다시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그러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두 번 물어봐도 단호하게 거절.



7. 화이트데이에 분홍색 상자에 담겨있는 사탕을 사 왔었다. 사탕 선물하는 날이라며~? 하시면서 검은 봉다리에서 꺼낸 그 상자 두 개를 잊기가 힘들다. 한번 사 오셨던 것 같은데 오래 남는 기억. 


 

8.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소개로 만나서 결혼하셨는데, 소개로 만나고 데이트를 매일 같이 하면서도 매일같이 편지를 3-4장씩 쓰셨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다면 꾸려서 책처럼 만들어둘 텐데. 아쉽게도 이리저리 이사를 하며 편지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할머니도 그때 얘기를 하면 괜히 좀 더 부끄러워하는 것 같고 그렇다. 내가 편지 쓰길 좋아하는 건 할아버지의 유전자겠거니.



9. 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기록 중 하나는 나에게 남아있다. 바로 납채서.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증조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아버지인 외증조할아버지에게 쓰는 편지 같은 것이다. 할아버지의 사주를 함께 보내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을 성사시켜 달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얼마 전 할아버지 제사 때 내가 꺼내어 가족 모두 함께 한자를 더듬어 가며 읽었다.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에서 납채서를 처음 알게 되고 우리 집 정리를 하다가 세월의 흔적이 가득 담긴 비단에 싸여있는 납채서를 보니 신기했다. 할머니가 버리겠다는 걸 부득부득 말려서 내 옷장 안에 보관 중이다. 



10. 할머니가 안 계시면 할아버지가 요리를 해주곤 하셨는데, 그의 주종목은 단연 된장찌개다. 나에게 만드는 법을 알려주시겠다고 하셨으면서, 결론적으로 레시피는 없었고 된장 넣고 짜면 물 넣고 싱거우면 된장을 더 넣는 일을 반복해서 꼭 뚝배기에 넘치도록 만들곤 했다. 와중에 두부는 꼭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가득 찬 뚝배기가 한 번씩 더 넘치곤 했었다. 근데 이상하게 그 맛은 참 좋았다. 나름의 당신의 루틴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기억을 기록화시켜두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근데 그냥 적으면 되는 거였다. 사실 뭐 근사하게 포장할 것도 없고, 엄청난 서사시도 아니고 그저 순간의 기억들. 나는 그런 기억들로 살고 있는 듯해서 줄줄이 나열해 봤다. 


조만간 또 비집고 올라오는 기억이 생기면 이렇게 적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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