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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Jan 24. 2024

포장의 기술

육체노동의 나날들_06

주문서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장바구니에 담았다면 이제 그 모든 물건을 고객에게 완벽한 상태로 배달하기 위해 포장할 차례다.

대형 마트나 다이소 같은 곳에서는 이 단계의 많은 부분을 손님이 직접 하는 방향으로 넘겼다.

즉 전에는 캐셔가 이 일을 담당했다면 그 부분만큼 줄어든 인원은 감축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곳은 고객 비대면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마트인 만큼 포장도 크루들이 해야 할 일이다.

포장이 제대로 되어야만 라이더들이 이것을 무사히 고객에게 배달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는 의외로 다양하다.

상품이 누락된 것을 모르고 고객에게 배달하면 고객센터로 연락을 할 테고 센터는 매장으로 연락을 한다.

스르륵 봉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토트에선 빠진 상품이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도 하지만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지는 일도 있다.

나도 한번은 아이스크림을 포장대 밑쪽으로 빠뜨리는 바람에 센터 연락을 받고 찾다가 다 녹은 걸 발견한 적이 있다.

그나마 우리 쪽에서 먼저 누락을 발견하고 센터로 이실직고하면 그래도 문제가 덜 복잡하므로 캡틴은 농담처럼 빠뜨릴 거면 알고 빠뜨리라고 말한다.

크루 입장에서 가장 짜증나는 사고는 매장에 주문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바빠 죽겠는데 모든 포장을 마친 순간 반품요청이 들어오는 경우다.

그럼 여태 한 포장을 모두 해체해서 다시 물건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놓는 과정이 수반된다.

냉장에서 나온 물건들은 단말기를 조작해 재고이동과정까지 마쳐야만 하는.......할많하않.......

이토록 화가 나는 건 포장 자체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보냉제 개수가 달라지고 보냉팩에 넣을지 말지의 여부도 다르다.

예를 들어 신선육이나 생선은 보냉팩에 보냉제가 추가되지만 일반 냉장 상품은 보냉팩만 사용하고 채소나 과일(여기서 또 세분화해서 berry류는 예외로 침)은 그냥 넣는다.

보냉제도 얼음팩의 사이즈가 존재하며 드라이아이스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당연히 여름에는 기준이 또 달라지기 마련이다.

종이 포장제의 경우 유리에 반드시 사용해야 하며 유리는 깨질 위험이 크니까 겹쳐서 싸면 안 된다.

정신 없어 손이 안 보이도록 포장하며 바쁠 때 박카스 8병 주문한 사람은 찾아가서 소리 한 번 질러주고 오고 싶다.

생리대, 콘돔, 임신테스터기 같은 민감한 물품은 겉에서 보이지 않도록 갈색 봉투에 한 번 넣어 감춰준 뒤에 포장해야 한다.

봉투는 대, 중, 소 세 가지가 있고 보냉팩은 여기에 특대가 있어서 네 가지다.

컵라면엔 젓가락, 요거트와 아이스크림에는 숟가락......얼핏 생각했을 때 좀 빠뜨리면 어때 싶은 것도 고객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요소로 여겨질 수 있다.

(직원 교육 때 들은 예를 들어보자면, 만약 호텔에서 컵라면이나 요거트 주문한 경우라면 젓가락과 숟가락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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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모든 품목도 어딘가로 끌고 가거나 어딘가에 꺼내어 놓을 때는 세심한 포장의 기술이 필요하다.

여름에는 짜증으로 뜨거워질 내 속과 겉을 위해 휴대용 선풍기와 아이스티를 더 시원하게 담기 위한 유리 텀블러가 필수.

아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때는 지난 세월의 흔적을 가리기 위한 풀 메이크업과 자연스러운 컬러로 염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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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의 기술 매뉴얼은 처음엔 너무 복잡해서 시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조차 모르지만 일단 한번 기본을 외워두면 계절이나 상황에 따라 변경되어도 금세 적응해서 적용할 수 있다는 것.

결국 모든 것은 기본을 잘 닦자는 결론으로 이번 글은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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