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윤경 님에게 고맙다고 꼭 전해 달래”
딸이 친구의 작업실로 일하러 간다고 하길래 마침 알맞게 발효된 매실즙을 유리병에 담아 포장을 해서 들려 보냈었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온 딸이 친구의 말을 그렇게 전했다.
독서모임을 시작하고부터 딸의 친구들은 나를 ‘윤경 님’이라고 부른다. ‘어머니’나 ‘아줌마’가 아닌 내 이름으로.
독서모임 첫날, 각자 자기 이름과 모임에 참가하게 된 경위를 간단히 말하고 나서 누가 먼저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름 뒤에 ‘님’을 붙여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을지 모르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모임 안에 학교 선후배 사이도 있고 모녀관계도 있는 우리의 호칭은 자연스럽게 통일되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눌 때 경어를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엄마와 딸이 함께 독서모임을 한다고?’ ‘세대를 불문한다는 게 말은 쉽지, 불편하지 않아?’라는 반신반의의 반응을 들을 때가 있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해서 가능하게 된 걸까, 우리 사회의 관습대로 서로를 불렀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출장이 모두 취소된 첫째 딸은 첫날만 참석하고 빠지기로 했는데 본의 아니게 고정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역시 코로나 때문에, 해외에서 머물고 있던 둘째 딸이 돌아와 뒤늦게 합류했다. 모녀가 같은 모임의 멤버가 된다는 게 우리도 처음엔 좀 꺼려졌다. 편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서로 밑바닥까지 아는 사이니까 공적인 모임에서의 발언이 의심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생활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공간에서 가급적 그걸 제거하고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처럼 호칭을 바꿈으로써 사회가 부여한 역할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부모, 자식, 선배, 후배, 친구, 다른 세대 혹은 젠더까지 그렇게 주어진 ‘역할’은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속박하고 타인을 손쉽게 재단하도록 만든다. 주고받는 것의 불평등을 교묘하게 조장한다.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하면서 나만 피해자라는 오해를 종종 하기도 한다.
서로를 ‘님’으로 부르면서 멤버 사이가 수직에서 점점 기울어져 수평이 되어가고 있다는 건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역할의 옷을 벗어 버리고 역할로 바라본 시선을 거두니 오히려 서로를 더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 같다. 그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관계가 주는 신선한 공기는 우리를 기분 좋게 한다.
‘책’이 초대하는 낯선 세계로 재잘재잘 떠들며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분 좋게 걸어 들어가는 우리. 거기엔 역할은 배제되고 발걸음 가벼운 어깨동무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