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단상 #4
계획은 최소한으로,
관광명소는 내키는 곳만,
지름길이 아니라 골목길을 한참 돌아서 목적지에 가기,
무작정 쏘다니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지금까지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빠르게 움직여서,
효율적인 동선으로,
가능한 많은 곳을 둘러보는 여행에 더 익숙했다.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여서 먼 곳을 여행하는데 이렇게 즉흥적으로, 느닷없이 떠나온 것도 처음이다. 무엇보다 내키지 않은 여행을 등 떠밀려하게 되었다는 게 자타공인 여행광인 나로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어쨌든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하루 만에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왔고, 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의 시작부터 예전과는 달라서인지 (심지어는 짐도 스스로 꾸리지 않았기 때문에 캐리어안에 무엇이 들었는지조차 몰랐다) 흥분과 설렘의 아드레날린으로 초롱초롱하기보다는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영화 속 시간여행자처럼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이번 여행의 원칙들이 예상보다 쉽게 지켜졌는지도 모르겠다.
계획은 즉흥적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계획에 없던 여행이니까. 잠들기 전에 하루치 계획을 세운 적도 있고, 그조차 귀찮으면 아침에 저절로 잠이 깬 후에 그날에 뭘 할지를 즉흥적으로 정하곤 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여행지의 정보는 포털,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에 엄청 많지만 대부분 천편일률적이어서, 몇 번 보다가 말았다. 그 정보들은 주로 꼭 가야 할 곳. 꼭 먹어야 할 음식, 꼭 봐야 할 것, 꼭 사야 될 것 등이 주로 여서, 보다 보면 마음이 촉박해지고 못하게 될까 봐 조바심이 났다. 내 욕망과는 무관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내 직관을 나조차도 못 믿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내 마음이 내키는 걸 가장 최우선으로. 여행도 인생도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는 게 (지금의 기억으로는) 놀랄 일이다. 내 욕망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알아내고 그렇게 산다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암튼.
사실을 고백하자면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에게 끌려가서 보고 듣고 먹고 싶다는 마음도 굴뚝같았다. 무작정 걷고 아무 데나 간다고는 하지만, 자유로움과 두려움이 늘 공존했다. 난 왜 이렇게 취향이 없지, 라는 자괴감도 들었다. 감성 세포는 이미 다 녹슬고 폐기되었나, 마음속에 아무런 파동이 일어나지 않아 죽은 감정을 억지로 불러일으킬 때도 종종 있었다. 하루 평균 삼만 보를 걸었으니 무작정 쏘다니기는 꽤 했는데, 돌이켜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하고 다음 동선을 체크하곤 했다.
그래도 그런 원칙 아닌 원칙들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이번 여행만큼 내가 있는 여기에 ‘현존’하고 있다는 걸 강하게 느낀 적이 없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도 그 강렬함을 느낄 수 있길, 그 마음을 기억할 수 있길 주문처럼 되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