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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Dec 07. 2021

어떤 마주침

여행의 단상 #5


스마트폰 속에 저장해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생각이 났다.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한 번은 한 달간의 여행에서 가장 긴 이동 중에 있었던 일이다. 목적지까지 6시간 넘게 운전해야 했기 때문에, 휴게소보다는 중간에 들를만한 장소를 서너 군데 찾아서 쉬었다가기로 했다. 예약해 둔 숙소에 밤늦게 도착한다는 메일을 미리 보내 놓은 후 이곳저곳을 내키는 대로 들러서 돌아보는 여정은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코스타 데 블랑카’를 그렇게 드라이브하다가 마지막에 들른 곳은 로마시대의 중요한 요새가 그대로 남아있는 해변이었다.


 어느새 선셋이 시작된 절벽의 요새는 적막했다. 깨진 병들이 이곳저곳에 있고, 마리화나 냄새가 배어 있어서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긴 했지만 발걸음은 어느새 요새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렌지 빛깔의 석양이 비추는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요새 안쪽으로 들어선 순간 그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딱 마주쳤다. 배낭을 멘 나체의 그를.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냥 입을 조금 벌린 채 서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후다닥 도망간 것은 오히려 그였다. “쏘리”라는 말과 함께. 그는 대체 왜, 거기서 무엇을, 이라는 의문이 든 건 한참 뒤였다. 위협적이긴커녕 나를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달아난 그가 가엾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그 시각, 지중해 먼 절벽 해안의 끝에서 아시안 여자 관광객이 등장하리라고는 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아닐까. 지금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알 도리는 없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고. 그만의 이유가 있었을 테지. 그보다는 인적이 없는 곳에서 나체의 남자와 맞부딪혔을 때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더 놀랍다. 그것도 나보다 한참 덩치가 큰 백인 남자인데.


여중 여고를 다닐 때, 우리 학교 주변에 상주했던 일명 ‘바바리맨’이 생각났다. 나체에 바바리만 입고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옷을 벌려서 우리를 놀라게 하던 변태남. 그때는 왜 그런 이들이 있었을까, 그걸 왜 아무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선생님들은 그저 우리더러 피해 다니라고만 했고, 부모님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른이 되어 남자 친구에게 말하니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후 더 이상 화제에 올리지 않았던, 잊힌 일이 그렇게 소환되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나체의 남자라는 공통된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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