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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Dec 10. 2021

낯선, 그리고 익숙한

여행의 단상 #6


유레카!!!

한 달간의 여행 막바지에 마침내 열쇠에 대한 비밀을 풀고 난 후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창피해서 차마 티를 낼 수 없기에, 속으로만. 열쇠에 대한 두려움 없이 숙소를 드나들게 된 순간 얼마나 후련했던지. 한 번에 열지 못하고 매번 진땀을 흘려야 했던 순간들이 너무나 바보 같아서 그동안 스스로를 얼마나 책망했던가.


숙소 건물을 통과하는 열쇠 한 개, 어쩌다가는 엘리베이터 앞 철문을 여는 열쇠도 한 개, 때로는 주차장 열쇠까지 한 개, 여기에 숙소 열쇠는 기본 두 개다. 호스트가 일러준 대로 다른 장소의 열쇠함의 번호를 눌러서 열쇠 꾸러미를 손에 쥐고 나면 늘 두려움이 따라온다. 이번에는 한 번에 열 수 있을까.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열쇠 사용자였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거지. 그때는 너무도 쉽게 열고 잠갔는데. 그새 다 까먹은 건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럽의 열쇠 작동원리는 좀 다르긴 하다. 변명 같지만, 그렇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한 번만 딸깍하고 돌리면 열리는 게 아니라 두어 번 뱅글뱅글 돌려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분명히 열리는 듯했는데 다시 잠겨 있고 이 방향이 맞는데 하다 보면 반대여서 머리가 하얘지곤 했다. 그리고 손목의 힘을 좀 더 써야 할 때도 많다. 대부분의 문은 닫으면 그대로 닫혔기 때문에 열쇠를 넣어둔 채 문을 닫을까 봐 늘 신경을 썼다. 다행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육중한 문과 복잡한 자물 시스템은 늘 부담이었다.


여행을 앞두고 스마트폰의 사진앨범에서 꼭 남기고 싶은 것을 제외한 모든 사진들을 다 지웠다. 아무래도 사진을 많이 찍게 될 테니. 나중에 보니 첫 일주일의 사진이 가장 많았고 내가 들어간 사진도 꽤 많았다. 갑자기 서게 된 낯선 이국의 풍경 앞에서는 사소한 것들도 다 감탄스러웠고, 그 속에 담긴 ‘나’를 기록하고 싶다는 욕망도 컸다. 노상카페의 커피 한잔까지도 다 사진으로 담았다. 그러다가 한주가 지나고 두주가 지날수록 매일매일의 사진이 현격히 줄어들어갔다. ‘나’를 담은 사진은 더더욱 그랬고. 아름답고 거대한 고딕 건축물들, 지중해의 새하얀 집들, 중세시대의 유적들, 눈부신 해변의 풍경들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감탄의 횟수와 카메라를 누르는 횟수는 줄어갔다.


익숙함의 과정이겠지만, 감흥이 줄어든 게 꼭 나쁘기만 한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방인이지만 풍경에 내가 점점 스며들어간다는 느낌이 좋았고, 대단한 명소보다 일상적이고 작은 것들이 눈에 더 잘 들어왔고, 사진에 담느라 부산스럽게 낭비했던 시간을 더 차분하게 즐길 수 있었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변해가는 시간의 수많은 방황과 두려움과 설렘과 안도감, 그런 감정들을 하나하나 오롯이 느낄  있었던  달이 지금은 가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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