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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Mar 05. 2022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1

1,2코스에서

날짜 : 2022년 2월 25- 26일

코스 : 1코스 (주천-운봉), 2코스 (운봉-인월)


<둘레길에서 만난 동물들>

쟤네들은 늘 패키지로 다니더라고요, 함께 걷던 G의 말에 아, 그래요라고 대꾸하고 나서 유심히 보니, 정말로 그랬다. 수컷 암컷 청둥오리 몇 마리들과 왜가리 한 마리의 조합. 생각해보니 한강변에서도 늘 그랬던 것 같다.


예년에 비해 꽤 추운 2월의 마지막 주의 지리산 자락은 기온이 낮지는 않아도 바람이 꽤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하는 흐린 회색빛의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우리는 지리산을 오른쪽으로 두고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4월이라면 벚꽃으로 가득할 길이 었겠지만 아직은 움튼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하천의 무성한 갈대 사이로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이 아직 겨울임을 실감케 했다.


미끄러운 얼음 위를 조심조심 걷는 수컷 청둥오리 두 마리와, 뒤에서 그걸 지켜보며 얼음 위로 올라갈까를 망설이는 두 마리, 그리고 그 옆에서 유유히 헤엄쳐 지나가는 암컷들, 역시 조금 떨어진 얼음 위에서 호위무사처럼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목이 긴 하얀 왜가리 한 마리. 무채색 풍경 속에서 수컷 청둥오리들의 짙은 초록빛 머리는 더 도드라져 보였다. 우린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놀이를 하듯 느린 무리의 이동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우리도 그들처럼 서두르지 않는 걸음을 이어나갔다.

공식적으로 오픈을 하지 않은 둘레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우리의 낮은 대화만 들리는 가운데 가끔씩 나뭇가지 위에서 한두 마리의 까마귀, 까치가 제 울음으로 소리를 보탰다. 바쁘지 않은 새들의 무해하고 정적인 움직임에 마음이 순해졌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마을 어귀의 집 마당에 묶여 있는 개들을 자주 만난다. 꼬리를 흔들며 컹컹 짖어대는 개들은 우리가 아는 척해주기를 바란다. 외롭다고, 심심하다고, 나 좀 봐달라고 외치고 있는 걸까. 그들은 나름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여겨지기에 명랑하게 아는 척해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칠 수 있었다.

하지만 좁은 철창에 갇혀 있는 대형견 두 마리 앞을 지나쳤을 땐 마음이 복잡했다. 동시에 그저 아름답고 조용하게만 여겨졌던 전원마을의 풍경이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아무리 봐도 임시로 철창 속에 보호되어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화에서 봤던 중세 감옥의 두껍고 녹슨 철로 만들어진 우리 안은 두 마리가 머물기에는 너무 좁고 그마저도 그들의 오래된 배설물로 가득 차 있었다. 컹컹 짖어대는 그들이 살려달라고, 제발 꺼내 달라고 외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상황을 묵시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상상하니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낭만적인 소망이 단번에 씻겨나갔다.

작은 유기견도 만났다. 심심풀이로 먹느라 내손에 들려 있던 과자봉지를 향해 달려와 코를 킁킁거렸다. 봉지를 다 풀러 주니 정신없이 먹는다. 목이 마를까 봐 생수를 따라서 옆에 놓아주었다. 목줄의 흔적이 있지만 눈가에 눈물자국이 짙고 털은 푸석거렸다. 정신없이 코를 박은 채 먹고 있는 녀석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길을 떠났다.


<동행에 대하여>

히말라야에서의 인연을 시작으로 이십 년째 함께 트레킹을 다니는 모임 친구들과 올해는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하기로 했다. 여행 말고는 개인적으로 연락할 정도의 막역한 사이는 아니지만 여행에서만큼은 각자의 친한 친구들보다 더 잘 맞는다고 서로 생각한다. 이십 년째 여행 우정을 쌓아온 우리는 전우애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친한 사이래도 여행에서 잘 맞기란 쉽지 않다.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나온 여행에서 내 취향과 원하는 것을 계속 양보하고 타협하다 보면 마음속에 앙금이 쌓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이킹’이라는 여행 방식에 먼저 합의가 되어있고, 걷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 자체를 즐기려고 한다. 걷는 여행을 목적으로 하기에 각자 평소에도 체력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고 누군가 여행 제안을 하면 바로 동의하고 실행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회비를 꼬박꼬박 모으고 있다는 전제가 있고 돈을 관리하고 예약을 담당하는 꼼꼼한 성격의 총무가 있다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한다.


걷다 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둘이 걷다, 셋이 걷다, 혼자 걷다 하는데, 맨 뒤에서 걷는 이는 항상 정해져 있다. 몸이 가볍고 낮고 느린 목소리로 가끔씩 충청도 특유의 유머를 툭 던지는 M이다. 그의 그런 행동을 오랫동안 눈치 채지 못했었다.

 

산에서 훨훨 날던 나는 몇 년 전, 아차 하는 순간에 눈길에 미끄러져 발목이 부러지고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하고 다시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까지 꼬박 일 년을 보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오르막길은 거뜬한데 내리막길에서 늘 벌벌 떤다. 조금이라도 길이 미끄러워 보이면 일단 겁부터 나고 예전처럼 모험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사고 이후로 다시 하이킹을 시작했을 때 M이 늘 내 곁에 혹은 내 뒤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우리 팀에서 가장 몸이 가볍고 빠른 그가 늘 맨 뒤에서 뒤처진 멤버를 묵묵히 봐주며 따라오고 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오르막길에서는 끄떡없지만 내리막길에선 늘 맨 뒤에 처질 수밖에 없는 나로선 혼자 남겨지는 게 좀 두렵다. 그가 곁에 있는 게 내게 얼마나 큰 안심이 되는지 M은 알고 있을까.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체력이 좋은지 얼마나 걸음이 빠른지 뽐내며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뒤의 동료들의 컨디션이 어떤지 먼저 살핀 적이 있던가. 부끄럽지만 없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것도 이렇게 늦었으니. 그런 다정한 마음과 행동이 내 몸에 배이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


앞으로 일 년의 대장정이 될(한 달에 한 번씩 1박 2일의 일정이기에) 지리산 둘레길에서 몸도 마음도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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