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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iq Oct 27. 2015

잘했네!

나 위로하기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근무를 나온지 어언 십일 개월이 다 되어갑니다. 그 사이 한국에 왔다갔다한 게 벌써 세 번 정도 되니, 힘들다느니 외롭다느니 하는 말은 징징거림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치사하지만 이해를 얻고자 변명을 하자면 음, 제가 여자라서요. 남녀평등사상과 페미니즘 등 온갖 사상에 거슬릴 수 있는 이런 변명 따위 죄송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땅끝(The Edge of the World)

처음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인 리야드 땅을 밟게 된 계기에 딱히 엄청난 용기나 포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연한 기회에 제가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전례 없는 해외수주계약이 체결되었고, 하필(!) 제가 막내로 있던 부서에서 파견 인원이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척박한 중동의 땅, 현재의 삶을 내려놓고 선뜻 떠나기가 쉽지 않았던 선배상사들을 대신하여 어찌 보면 총대 매고 오른 길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친한 친구들은 깔깔대며 이왕 이래 된 거 석유왕자나 물어오라고 하더군요.

말은 총대 매듯이라 얘기하긴 했지만 그 당시 저는 미생의 삶에서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세대의 삶이 꽤 녹록지 못하여 취업의 기회가 닿자마자 제 적성을 무시하고 덥석 물어버린 것이 제 오랜 갈등의 시작이었다 할 수 있겠네요. 전 언제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란 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순수한 여인 1에 불과 했고, 실제로 취업에 목이 탔던 그 당시엔 단 돈 얼마라도 내 스스로 벌면 행복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순진한 생각은 직장생활을 하는 삼 년 동안 아주 처절하게 부서졌습니다. 행복은 커녕 이런 삶은 사는게 아니라 생존해 나가는 것일 뿐이라며 호기롭게 넘기던 술잔에 퇴사를 마음먹다가도, 지옥과도 같은 취준의 시기를 어떻게 다시 보내야 할지 그 아득하고 막막한 마음에 다음 날 홀연히 여섯 시 반 기상에 여덟 시 출근도장을 찍어대던 삶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사우디 파견은 제 인생 두 번째 도피행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2014년 12월 리야드 저녁 6시 30분

이유 없는 삶은 괴롭습니다. 게다가 주관이 없기에 남의 말에 흔들리기가 참 쉽죠. 처음엔 남들이 하길래 왠지 해야 할 것 같아서 하고, 따르는 가벼운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도피한 삶에 무슨 큰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남이 결정한, 남의 삶을 사는 그 공허한 사실이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지요. 이렇게 사는 것은 안되겠다 생각한 것은 제가 함께 지내는 동료들과 저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낮추기 시작한 때부터였습니다. 그들은 갖고 나는 갖기 못한 것에 대해 세어보던 그 버릇이 스스로는 물론 관계마저 해칠 수 있을 것이란 섬칫한 생각에 이제 내 마음을 달랠 때가 왔노라 생각했습니다.

한때 즐겨듣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찾아 듣던 팟캐스트가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가는 주제 편을 재생시키고 오랜만에 내용을 경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전 꽤 원하던 답을 얻었습니다. 제 식대로 약간 고쳐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행복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라고도 하지요. 저 역시도 그러한 이들 중 일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왜 결코 행복하지 못하는가. 그건 바로 내 옆에 있는 것이 행복이란 사실을 몰라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간혹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두고 행복에 다가가는 토큰을 얻었다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한 걸음 나아가봤자 행복은 어쩐지 저만치 또 멀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다가간다 생각하면 멀어지고 멀어지는 게 나와 행복의 관계인가 허무할 때가 많죠. 내가 지닌 것들이 결국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급티켓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로 말입니다.

병따개를 닮은 킹덤타워 99층에서 바라본 리야드시내야경

그제서야 비로소 제 보따리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남들과 견줄 만한 것들이 제법 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하나 나열하다보니 이정도면 제법 괜찮은 삶이 아닌가 우쭐해지기까지 합니다. 그 보따리 속에는 재능이나 능력적인 것들도 있지만, 이제껏 나와 함께 해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문득 그들에 대한 고마움이 일고 타지에서의 그리움이 솟아납니다. 그리고는 생각하게 되죠. 아,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저는 나약한 사람이 되어놔서 늘 이해와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지껏 그러한 것들을 늘 타인을 통해 구하려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니까 곧 있으면 이십대의 막바지를 맞이하게 되는 이 즈음에는, 좀처럼 들지 않던 철 좀 들어 스스로를 독려하는 방법에 익숙해져봐야겠습니다. 순서는 이렇습니다. 스스로가 또 난쟁이똥자루마냥 여겨지는 시점에는 내 어깨에 맨 보따리를 얌전히 내려놓고 하나, 둘 내가 가진 것을 꺼내 나열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스스로에게 칭찬도 해 주곤 해야할 것 같습니다. 지금만 봐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마냥 현실도피행으로 단정지었던 이 극한의 파견근무지에서 아득하기만 했던 제 삶의 방향에 큰 물길을 내지 않았습니까.     


저는 꽤 탁월한 선택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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