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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Sep 28. 2021

헛소리

인간이 2만 년 동안 아무 진보도 하지 않았다고?

"지난 월요일 인간역사특별전에서 알타미라 동굴 천장화를 봤는데, 옛날에 이를 본 피카소가 말했다네 - 인간은 2만 년 동안 아무 진보도 하지 않았다고."


국립박물관 관람하고 보낸 자네 메일 읽으니, 한국의 대중문화 수준이 불과 몇십 년에 고공행진, 하늘 높이 올라간 듯하네.


옛날 우리 중학교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술 전시" 행사가 있었는데, 교문 안 큰 마당에 각목을 못질해 틀을 세우고 판자를 고정해서 커다란 모나리자 사진 붙여 학생들에게 천재 화가의 작품을 보여주었지. 기억을 더듬노라니,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그 가을의 저녁 햇살이 더욱 곱게 느껴지네.


자네가 보았다는 "인간역사특별전"을 검색해 보니, 중앙박물관 ‘호모 사피엔스 특별전'이라 소개되어 있는데, 전시장에 고생 인류의 인골 모형을 배치하고 컴퓨터 그래픽과 입체 음향 기술을 적용해서 알타미라 동굴에 직접 들어가 보는 것 같은 분위기도 연출했다고 하네. 관련 신문기사에는 자네가 언급한 것처럼 '알타미라 동굴 관람 후에 피카소가 했다는 말'도 적혀있더군.


몇 년 전 스페인 남부의 말라가(Malaga)에 있는 피카소 생가를 견학하며, 그가 미술 선생이었던 아버지 영향으로 그림 공부는 했지만, 학교 중퇴하고 배운 것 별로 없이 자기 방식대로 그리고 조각하고 도자기 만들어 인기 화가로 대성한 것 빼고는 미술사에 대해 거론할 만한 지적 소양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알타미라를 보고 난 피카소가 "2만 년 동안 아무런 진보가 없었다"라고 말했다니 어이가 없네.


'미의 역사'를 저술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말 했으면 "내 생각이 틀렸나?"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련만, 어쨌든 신기해서 피카소의 말을 찾아 검색해 봤네. 피카소가 스페인 사람이니까 스페인어로... 뭔가 나오네!


A pesar de mis esfuerzos, no pude localizar a los testigos o una cita que probara que tal sentencia fuera de él. Por el contrario, confirmé que en una entrevista hecha al crítico de arte Téride, el artista Joan Miró, dijo en 1928: “El arte está en decadencia, desde la edad de las cavernas”.


스페인의 한 잡지사 사이트에 이미 피카소가 했다고 알려진 말의 확증을 찾아본 기사가 있는데, 결론은 피카소에 대한 자료는 없고, 다만 스페인의 추상화가 후안 미로(Joan Miró)가 1928년에 어떤 인터뷰에서 "예술은 혈거 시대 이후로부터 퇴락하고 있다"라고 말했다네.


나도 1994년에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 들어가 실제 천장에 그려진 들소 그림들을 보았네만, 동굴이 아주 초라하고 천장도 낮은 데다가 조명도 어두워서 천장에 그려진 그림들을 한눈에 다 볼 수도 없었거니와 바닥 여기저기에 흙이 잔뜩 쌓여있어서 별 감동을 못 느꼈었네. 1928년에는 아마 손에 호롱불 들고 들어가 봤을 텐데, 미로가 실제로 거기 들어가 보았는지 사진만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시예술을 극찬하였다 하니 미술가라 보는 눈이 좀 다른가 보네. 하지만 미로가 하다못해 비단에 그려진 고려시대의 탱화(가치를 모르는 조선인에게 일본인 프랑스인 들이 몇 푼 주고 다 가져가서 한국에는 별로 없지)를 보았다면 그런 말 못 했을 것이네.


특별전을 개최한 사람들도 대중의 관심을 모으려고, 근거 없이 피카소의 말을 인용해서 알타미라 미술을 과대 선전한 듯하네. 지금처럼 디지털 통신기술이 발전한 정보화(情報化) 사회의 무수한 정보 중에는 위험한 오보(誤報)도 많지.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가 하는 말들을 정보로 믿고 코비드 감염 무시하고 인종 차별하며 국회에 난입한 트럼프 신봉자들은 오보의 희생양인데, 솔깃한 말에 찬동하여 발끈하면 범행을 저지르고도 잘못한 걸 모르게 되네.


옛날 우리 전자과에 종철이와 해석이를 주체로 한 '광염회'라는 성경공부 모임이 있었던 걸 기억하나? 어느 날 한 번 자네와 함께 거기 가서 성경공부용 교재의 구절 읽고 토론한 적이 있는데, 회억(回憶)하니 해석이가 성경을 읽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마태복음의 이 경고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풀어 오른 헛된 소리'에 주의하라는 뜻이었지?


불자(佛者)이셨던 우리 어머님이 아침저녁으로 독경(讀經)하며 근행(勤行)하셔서, 어릴 때부터 귀에 못 박히게 들었던 경문(經文)에 이런 게 있네.


"...안상이기고사리불제불지혜심심무량기지혜문난해난입일체성문벽지불소불능지소이자하..."

석존(釋尊)께서 편히 일어나 제자 사리불에게 이르시길, 제불(석가모니 이전의 모든 부처님)의 지혜가 한없이 깊어 그 지혜의 문을 찾아 들어가기 어려운 지라, 각성한 불자들도 알 수 없으니 어찌하랴?


용맹정진(勇猛精進)!

열심히 갈고닦으면 언젠가는 진리가 눈앞에...

여기저기 다니고 이것저것 뒤지면서 공부 많이 하세.

공부해서 남 주는 게 아니라지만, 친구들에게도 너그러이 퍼주면서...


정견(正見), 정각(正覺), 정언(正言)!

제대로 보고 옳게 깨달아 바르게 말하면,

성문(聲聞) 연각(緣覺)을 거쳐 보살계(菩薩界)에 이르고,

세상과 인연을 끊음으로 마침내 불계(佛界)에 도달할 것이라...


40여 년을 부자석신명(不自惜身命: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드린다)하시던 어머님이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셔서 ‘안나'라는 세례명을 받으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묘지에 안장하기 전에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렸네. 왜?


셋째 누나가 정신병 난 게 불교를 잘 못 믿어서 그랬다는 둘째 누나의 말을 듣고 죄책감을 느끼셔서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바로 개종하셨던 거야. 개종으로 누나의 병이 낫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신심이 강하셔서 기도문도 잘 외우시고 자주 기도하셨지.


몇 년 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대학병원 집중감시실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누워서 주기도문을 외우시고 담배를 달라고 하시니까, 간병인들이 탄복하여 자꾸 하라고 부추겨서 열심히 반복하신 결과, 간호원들이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어머니 침대를 간호원실 옆에 두더니, 다음날 일반병실 2인실로 옮겨 놔서 간병인 쓰기 전에 내가 꼬박 일주일 꼼짝없이 옆에서 간병하느라고 진땀을 뺐었네.


염불이고 기도고 간에 시와 때를 안 가리고 하면 고역을 치르는 수가 있으니, 자네도 기도할 때 옆에 누가 있는지 잘 보고 하게.


지난 4주 동안 4400킬로미터를 달리며 세상 구경하고 집에 돌아오니까, 마치 어려운 숙제를 해 놓은 기분이라 잠 잘 자고 일어나 답장을 늘여 썼네만, 요지(要旨)는 오보에 속지 말고 지혜롭게 살면서 역경이 닥쳐도 꿋꿋이 자신을 지키자는 것이네.


첨부 1. 알타미라 동굴(La cueva de Altamira) 사진


1994년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중 북쪽 해안길을 따라가면서 원시 동굴 채색화가 있는 핀달 동굴(La cueva de El Pindal)과 티토부스티오 동굴(La cueva de Tito Bustillo)에도 들어가 봤는데, 2019년에는 25년 전에 여행했던 추억의 길을 따라가면서 알타미라 동굴을 다시 들러 봤네. 그때는 오래전에 예약한 관람자만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지원자 중에서 한 달에 한 번 씩 추첨으로 뽑힌 사람 몇 명만 동굴에 들어갈 수 있지. 다행히도 동굴 옆에 박물관을 새로 단장하고 근처에 알타미라와 유사한 동굴을 복제해 놓아서 천장화를 잘 볼 수 있었네. 옛 기억을 더듬어 비교하면 복제관이 오히려 더 보기 좋아서, 굳이 오리지널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더라. 자네가 비록 국립박물관에서 재구성한 것을 보았더라도 실제적인 감동을 느꼈으면 원정 가서 본 셈 치게.

알타미라 동굴 복제 전시실 입구: 발굴 현장 재현 - 2019년 9월
알타미라 동굴 복제 전시실 내부: 천장화 - 2019년 9월


첨부 2. 1992년에 프랑스 라스코 동굴(La grotte de Lascaux)의 채색 벽화를 보고 나서 달리는 차 안에서 인상에 남은 걸 그렸네.

프랑스 라스코 동굴의 벽화를 보고... 1992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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