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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Jeong Sep 24. 2017

야만적인 사람들

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 안톤 체호프

얼마 전 이사를 해서 '필요한걸 다 사리라!' 마음먹고 광명에 있는 이케아에 갔습니다. 점심시간 지나 도착했는데 여유 있게 유유히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매장 문 닫을 무렵 전투적으로 물건들을 고르고, 배송시키느라 진이 홀라당 다 빠졌습니다. 집에 와서 마신 맥주가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주워 담았는지 영수증이 엄청 길었습니다. 줄자로 길이를 재어봤더니 72cm더군요. 너무 인상적이라 '액자에 걸어놓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싸게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케아에서는 자신들의 제품들로 '자신을 표현하라'라고 합니다. 다양한 소품들로 개인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읽었던 기사 중에 이케아 같은 제품들이 오히려 몰개성화와 창의력 저하를 조장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주방 식탁 위 조명을 바꾸려고 봐 둔 제품이 있었습니다. 그 제품을 찾으러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 제품을 보고 있었고 몇몇은 카트에 이미 담았더군요. 제 눈에 좋아 보인 제품은 남들 눈에도 좋아 보이겠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저희 집 주방에 달려있는 조명처럼, 다른 선택을 하기 귀찮아서 그냥 이케아 제품 중에 적당히 괜찮은 것을 골라 선택했을지 모르겠네요. 제품이 엄청 다양하지만 어쩌면 그 안에서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씁쓸함도 들었습니다.


가끔 창의력 없는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을 봅니다. 영혼 없이 음식은 무조건 치킨 이리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요즘 이게 유행이니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려야 된다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뭔가 시도를 하기보다는 남들이 만든 유행이나 틀 안에서만 즐기려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 듯합니다. 그들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하고 덕분에 유행이 만들어지는 거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은 야만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들을 보면 예측 가능한 말과 행동들을 많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말해서 또 듣기 지겨운 말을 지겹게 합니다. 원하는 건 그저 맛있는 음식, 재미난 무언가로 무의미한 날들을 지워야만 한다는 야만적인 목적만 가득 찬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야만적인 사람들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닙니다. 누구나 어떤 시기가 되면 야만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카멜레온이 주위 환경에 따라 몸 색깔이 변하듯, 사람도 어떤 환경이나 시기에 따라서 창의력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가, 또 야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야만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자기가 야만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삶의 밸런스가 무너질 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회사-집-회사', '집-학교-집-학교' 만 반복하다 보면 수많은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 보고 지나치는 건 아닐까요? 그럼 삶의 밸런스는 언제 무너질까요? 가장 강력한 첫 번째는 '사랑을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연애를 시작하면 평소 안 하던 선택과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슬퍼하거나 반성하세요.) 그동안의 생활을 지속해준 마음속의 커다란 축 중 하나가 허물어진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너무 오래전이라, 7년 사귀고 결혼한 지 6년 된 와이프를 보면서 그런 기억과 감정을 정확히 떠올리기는 힘들지만) 그 순간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삶을 마주하게 되는 듯합니다. 손에 쥔 패가 좀 더 많아지는 것 같다고 할까요. 하지만 누군가와 사랑이나 연애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시기도 있지요. 그래서 때가 왔을 때 더 많이 만나보라는 조언은 정말 아쉬움의 밑바닥에서부터 나오는 충고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지요. 하지만 다행히도 사랑은 꼭 남자 친구, 여자 친구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 반려견이나 취미 등, 연애 대상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라톤을 하고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받아 내년쯤에 철인 3종 경기를 나가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자전거와 수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여태까지 몰랐던 세계들이 있더군요.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던 자전거가 보이기 시작하고, 주위 사람들 중에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대화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글쓰기 모임에 나가고 있습니다. 멤버들 중에는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글과 연기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세계는 어떠한지도 슬쩍 알게 되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영화 보듯 즐기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불금엔 치맥이라는 반복되는 일상에만 갇힌 야만적인 날들이라면 몰랐던 것들이 삶의 균형을 깨뜨리면서 좀 더 다양한 가능성과 창의력을 가진 사람으로 바꿔주는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것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새로움을 발견할 때, 거기서 시작되는 일상의 새로움이 있는 듯합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책임질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구로프처럼 자신을 뒤흔든 새로운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내가 그저 1차원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더 즐거운 삶을 살 수도 있었을 '사랑에 대해서'의 알료힌처럼, 나도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로 더욱더 창의력 없는 삶에 빠져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창의력 없는 야만적인 사람이 되기에는 세상에 즐거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사랑을 하게 되든, 무엇을 시도하게 되든, 다들 정말로 즐기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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