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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Jul 10. 2019

펜싱 이야기 #13. 승리라는 여정

 펜싱과 같은 일 대 일 스포츠의 가장 큰 매력은 도전이다. 우리는 더 강한 상대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타 클럽, 타 지역으로 훈련을 떠나고,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시합을 쫓아 버스에 오른다.


 매 년 새로운 피가 업계로 흘러들어온다. 조금 어설펐던 선수들은 이제 제법 선수 티를 내고 강했던 상대는 더욱 강해진다.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담력과 배짱은 한 여름 수박처럼 짱짱해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강함을 추구하며 추운 겨울, 황사와 미세먼지, 꿉꿉한 장마, 무더운 여름을 견디며 두꺼운 펜싱복을 피부 삼아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다. 지루한 기본기를 매일 연습하고, 일 년에 한 번이나 써먹을까 말까 한 신기술에 도전한다.


 강해지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스쿼트를 하고 윗몸일으키기, 코어 운동, 팔 굽혀 펴기를 하면서 근육을 강화한다. 15점의 긴 랠리를 위해 심장과 폐를 강화시키고 순간적인 스피드를 위해 발가락 근육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과 품을 들여 제법 펜서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이다.


 강해지기 위해서 힘이 필요했다면 부드러워지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과 어깨와 허리와 다리에 힘을 빼야 한다. 힘을 포기해야 유연함이 생긴다. 이는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훈련 전부 뒤집고 판을 새로 짜야하기 때문이다. 강한 힘과 빠른 스피드로 쉴 새 없이 퍼붓던 공격을 잠시 멈추고 부드럽지만 약하지 않유연하지만 물렁물렁하지 않게 움직여야 한다.


 훈련 방식은 전과 동일하다. 기본기를 훈련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연습 게임을 통해 숙련도를 점검한다. 그런데 여기서 딱 하나가 바뀐다. 우리는 그것을 '디테일'라고 부른다. 두루뭉술한 페인팅 이후 마구잡이로 찔러 들어가는 공격으로 어지간한 상대는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 위를 한 번 올려다보자. 완만한 오르막에서 갑자기 절벽 하나가 솟아올라 있다. 이제 우리는 저걸 타고 올라가야 한다.


 이제는 모든 동작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모든 마무리 전엔 반드시 정확한 과녁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상대를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몰고 가야 하고 내가 의도했던 곳을 정확히 찔러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페인팅 하나, 발 동작 하나까지 섬세하게 움직여야 한다. 상대 근처에 툭툭 떡밥을 던져놓는 게 아니라 상대 코 앞에서 향기로운 미끼를 살랑살랑 흔들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잘 써먹었던 기술을 하나씩 점검해야 한다. 이번에 얻은 점수가 기술인지 타이밍인지, 아니면 운인지를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공격의 폭도 넓혀야 한다. 무기 10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상대에 따라, 점수에 따라, 시간에 따라 골고루 써먹을 수 있다.


 방어는 지금보다 더 단단해져야 한다. 이제 웬만한 상대는 '방어 - 반격'의 단순한 패턴으론 점수를 낼 수 없다. 어설픈 반격은 역공을 당하기 딱 좋다. 반격이 어설프다면 반격을 포기하고 정확하게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도 좋다. 다리는 더 빨라져야 하고 자세는 더 낮아져야 한다. 상대의 공격 중 보이는 허점을 뚫고 들어가는 집중력도 필요하다.


 모든 동작의 선을 새로이 점검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 그 작은 동작 하나가 승리를 결정짓는다. 디테일을 다듬어 선예도를 높여야 한다. 이동과 동작 사이에 군더더기를 빼고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공격과 수비를 완성해야 한다. 무엇을 버릴 것인지 결정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를 결정해야 한다. 꼭 필요한 동작이 아니면 모조리 삭제해 버리자. 토끼를 사냥하는 매처럼 단숨에 꽂아버리듯 말이다.


 승리에 취하지 말자. 오늘의 승리는 도착이 아니라 여정일 뿐이다. 지금부터 만날 상대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마구잡이로 찔러 들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앞으로의 시합 하나하나는 지금까지 만난 상대 모두를 더한 것보다 더 많은 준비와 정성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진짜배기들의 시합이다. 물론 당신도 그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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