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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Aug 28. 2019

펜싱 이야기 #.20 연재를 마치며

 펜싱은 재미있는 스포츠지만 누구에게나 다 그렇지는 않다. 이보다 더 싸고 쉽고 재미있는 것들이 주변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밀도 있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펜싱은 어쩌면 그저 스트레스 덩어리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용어도 동작도 어렵고 규칙도 복잡하다. 시작하기도 어렵고 중간도 어렵고 끝까지 어려운 운동이다. 스트레스를 풀러 왔다가 도로 쌓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펜싱은 정직한 운동이다. 실력과 노력은 정비례한다. 타고나지 못한 운동 신경과 체력은 연습과 반복 훈련, 연구와 반성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운동 쪽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펜싱을 우습게 보고 도전했다가 두 달도 못 견디고 떠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운동치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꾸준히 성장해서 메달을 목에 거는 경우도 제법 많다.


 대표적인 예로 내가 그렇다. 비리비리와 나약함 쪽에선 제법 콧방귀를 뀌는 내가 지난 6월, 작은 시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참가 선수도 많지 않았고 참가자들의 경력도 고만고만했던 지방 시합이었다. 그래서 코딱지 만한 시합에서 따는 금메달 그까짓 거 일반인들 눈에는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리고 같이 운동을 했던 펜서들에겐 결코 그렇지 않았다. 7년이란 시간 동안 내가 들인 노력에 대한 상징이라고 할까, 보상이라고 할까. 아무튼 내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 보니 어느새 낮은 산 정상에 올라 있구나 하는 잔잔한 감동이 있었다.


 살면서 내가 무언가를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이 있었던가. 인생 최대의 시간이라는 수능 시험에서조차 잘 안 풀리는 문제는 그냥 넘겨버렸던 대충대충 라이프였던 내가 이렇게 변했다는 건 스스로도 믿기 힘든 변화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펜싱이 있었다.


 누군가는 펜싱을 일컬어 순발력과 반사 신경의 스포츠라 말한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상대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고 반격을 한다. 1초에 두세 번 검이 오가는 사이사이 페인팅을 섞어 찔러 넣는다. 상하좌우를 포함해 최대 8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전부 피해내고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는다. 짧은 거리에서 엄청난 속도로 전개되는 공격과 방어를 보다 보면 도대체 누가 찌른 건지 파악조차 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그래서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승리는커녕 시작조차 불가능할 것이라 짐작들을 한다.


 틀렸다. 사실 그건 순발력도 반사 신경도 아니다. 대부분의 펜서들은 보고 판단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여주는 번개 같은 동작들은 그저 무수한 반복 훈련으로 몸에 새겨진 동작일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만큼 훈련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결코 우리의 능력이 그들에 못 미쳐서가 아니다.


 복싱에서 나오는 럭키 펀치는 우연히, 혹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링에 오르기 전 끊임없이 훈련을 한 결과이다. 어떤 상황이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펀치는 사실 수천 번, 수만 번 연습했던 반복 훈련의 단 한 번의 성과일 뿐이다.


 펜싱은 다운이라는 시스템이 없다.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 올려야만 승리를 취할 수 있다. 그래서 평소 어떤 훈련을 했는지 시합에서 다 드러난다. 9분 안에 15점을 따내려면 상대를 15번 정확하게 찔러야 한다. 어쩌다 한두 번은 운으로 찌를 수도 있겠지만 15점 전부를 그렇게 따낼 수는 없다. 15점을 먼저 따내 승리를 취했다는 것은 내가 수 십 번에서 수 백번에 이르는 경합에서 우의를 차지했다는 것이고, 거기엔 그동안 내 몸에 새겨졌던 기술, 전술, 전략, 판단력 등이 총동원되어 검을 통해 발현되었다는 뜻이다.


 펜싱은 다른 모든 스포츠와는 다르게 시간과 노력이 톡톡히 제값을 하는 스포츠이다. 노력의 맛, 노력이 일궈낸 승리의 달콤한 맛을 한 번 보게 되면 그것이 다른 일로도 이어지게 된다. 생활하는 방법도 일에 임하는 관점도 달라진다. 나에게 있어 펜싱은 인생의 축을 비틀어버린 거대한 시발점이었다. 성공에 대한 욕망과 도전에 대한 충동을 부추기는 연료이자 불꽃이었다.

 

 7년 전만 해도 펜싱은 우주비행만큼이나 일반인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펜싱을 한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이번 올림픽은 출전했느냐'였다. 클럽도 없었고 시합도 없었다. 비인기 종목 중에서도 최고 레벨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지방 곳곳에서 아마추어를 위한 클럽이 생기고 있다. 서울, 경기 지역에선 펜싱클럽은 발레 학원만큼이나 흔해졌고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그리고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우수한 클럽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시합도 전국 각지에서 매월 한 번 이상은 치러지고 있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


 인생을 시작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려면 최소 30년 이상은 걸린다. 자신의 인생의 정점을 향한 시간이 긴 만큼 새로움을 시도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펜싱은 2년이면 된다. 2년이면 업계에서 자기 자리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인생을 변화시키는 데 좋은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내년에는 새로운 신인들이 많이 흘러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강이 더 맑고 깊어졌으면 좋겠다.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망망한 강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 펜서들이 한데 어우러져 신나게 놀았으면 좋겠다. 따스한 햇빛에 반짝이는 형형색색의 지느러미를 품은 거대한 아마존의 풍요로움을 꿈꾸며 '펜싱 이야기' 연재를 마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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