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회진 Apr 25. 2019

펜싱 이야기 #1. '귀족 스포츠'라는 오명

펜싱은 왜 부담스러울까?

 펜싱은 비인기 종목이다. 가까운 클럽으로 달려가 체험 수업을 받아보면 이 화려하고 매력적인 스포츠가 왜 비인기 종목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바로 용어와 규칙 때문이다. 프랑스가 종주국인 탓에 모든 용어가 프랑스어로 되어 있고, 발음이나 용어 구성이 어려워 프랑스 용어에 영어식 표현을 붙인 다음 한국식으로 마음대로 편집해버린 용어가 많다. 말 그대로 코치가 대충 적당하게 말하면 학생이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시스템이라 스스로 사전이나 교범을 뒤져 용어를 공부하지 않으면 10년이 지나도 철자는 커녕 정확한 발음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는 협회의 잘못된 관행이나 아집이라기 보다 어린 나이에 운동을 시작하는 학생들을 배려한 협회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펜싱은 그룹 레슨만으로 실력을 키우는 것이 꽤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1:1 레슨을 받는다. 레슨비는 타 운동에 비해 조금 비싼 편인데 (장비는 의외로 비싸지 않다.) 그래서 클럽에서는 비싼 수업료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무려 '귀족 스포츠'라는 문구를 창문과 브로슈어에 덕지덕지 붙였다. 딴에는 명품 브랜드의 홍보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 '펜싱을 배우면 당신도 귀족이 될 수 있다.' 정도의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되려 일반인들에게 '돈 없으면 오지마.'라는 불쾌감만 심어주었다. 아무래도 펜싱이 그들만의 스포츠가 된 것은 그 놈의 '귀족 스포츠'라는 단어가 결정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 글을 읽게 되는 분들께 노파심에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펜싱은 결단코 귀족 스포츠가 아니며, 펜싱을 배운다고 절대로 귀족이 될 수 없다. 나는 펜싱 중 '플러레'라는 종목을 하고 있는데 이 종목은 우습게도 귀족들의 결투나 기사들의 전투에 사용되었던 실전용 검술조차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펜싱이 스포츠가 되기 전의 이야기를 좀 곁들여야 한다. 펜싱은 플러레, 에뻬, 사브르로 나뉘는데 에뻬는 영화 '삼총사', '아이언 피스트' 등에서 자주 나오는 귀족들의 일 대 일 결투용 검술이고 사브르는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 '캐리비안의 해적' 등에서 나오는 일 대 다수, 혹은 다수 대 다수용 전투용 검술이다. 예를 든 영화 속 검술을 좀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면 에뻬식 검을 들고 사브르 검술을 쓰는 등 고증이 좀 엉터리인 구석이 있기 때문에 어떤 느낌인지만 참고하시길 바란다.


 과거에는 도로의 폭이 지금보다 훨씬 좁았고 하수 처리 시설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길은 미끄럽고 냄새나는 오물 투성이였다. 당시 귀족들은 돈이 많을수록 손잡이 장식이 화려한 검을 차고 다녔는데, 길이 좁다보니 길을 지나다 검의 손잡이끼리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고, 먼저 사과를 할 리가 없는 콧대 높은 젊은 귀족들은 그 자리에서 결투를 벌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한다.


  결투가 시작되면 좁은 길을 피스트 삼아 거리를 재며 상대를 찌를 준비를 한다. 검을 크게 휘두르면 구경꾼이 맞을 수도 있고, 근처에 걸린 간판이나 빨래줄 등에 검이 걸려 뭔가 해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좁은 공간에서 확실하게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찌르기만을 쓰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의 '에빼'라는 종목이 되었다. (에뻬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전신을 다 찌를 수 있고, 동시에 찌르면 동시에 점수가 올라간다.)


 그런데 워낙 찌르는 속도가 빠르다보니 둘 다 같이 찌르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운 좋게 즉사하지 않더라도 (아직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이라) 더러운 칼로 목 아래부터 배꼽 사이를 찔리면 100명 중 90명 이상은 고열을 앓다가 일주일 내에 죽었다고 한다.


 당시의 검술 교관들은 국가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귀족의 자식들이 허망하게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검 끝에 솜을 달고 너무 위험한 얼굴 공격을 금지하면서(훈련이니까), 단번에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부위만을 찌르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결투 중 둘 다 죽는 일을 최소화 하도록 한 쪽이 공격을 하면 다른 한 쪽은 반드시 수비를 하는 새로운 일 대 일 결투 훈련용 검술을 만들었고 그것이 현재의 '플러레'가 되었다. (플러레는 얼굴과 팔, 다리를 제외한 목과 몸통만 득점을 인정한다.) 이것 때문에 동시에 찔러도 한 사람에게만 득점을 인정하거나 아예 무효로 처리해 버리는, 일반인들은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우선권'이라는 희안한 규칙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펜싱은 일본의 유명한 만화 '바람의 검심' 의 유명한 대사인 "검은 흉기, 검술은 살인술..."과 마찬가지로 펜싱은 그저 효율적이고 빠르고 확실하게 상대를 죽이는 방법을 연구해 만든 살상 무술일 뿐인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 펜싱을 하면서 새로 방문하는 이들에게서 방문이 부담스러웠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솔직히 펜싱은 결코 쉬운 운동은 아니다. 개념을 잡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리고 자세를 제대로 잡는 데까지는 상당한 많은 시간이 걸리는 어려운 운동이다. 외워야 할 것도 , 배워야 할 것도 많은 복잡한 운동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 운동은 결코 방문이나 체험조차 부담스러운 부자들의 기묘한 악취미가 아니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저렴하게 배울 수 있는 방법과 장소도 아주 많다. 그렇다고 그 곳에서 절대 대충 가르쳐주지 않는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주위 어느 클럽이든 한 번 방문하여 구경해 보시길 권해드린다. 펜싱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별종 스포츠가 아니라 땀과 투지가 불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다른 스포츠와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펜싱 이야기 #0. 펜싱하는 남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