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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May 15. 2019

펜싱 이야기 #5. 닭치고 돌격은 곤란해요.

리듬과 거리에 대하여

 힘과 속도는 일차원적인 요소이다. 힘과 힘의 싸움에선 센 쪽이 이기고, 속도와 속도의 싸움에선 더 빠른 쪽이 이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스포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 대 일의 승부를 겨루는 거의 모든 스포츠에서 지겹도록 언급되는 단어가 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느림이 빠름을 이기는 것, 그것은 바로 '리듬'과 '거리'이다.


 강한 힘과 빠른 속도를 이용한 공격은 먼저 호흡을 가다듬고 배에 힘을 잔뜩 준 다음, 힘껏 도움닫기를 해서 찌르는 공격이다. 이런 공격은 대부분이 정박자에 떨어지게 된다. 즉 템포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박자를 읽히는 순간 쉽게 막힌다는 뜻이다. 그렇게 때문에 펜싱에서는 리듬을 만들고 유지하고 또 조용히 변화시키는 훈련을 많이 한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박자를 간파당하는데 그 첫 번째는 바로 발소리이다. 평소에는 통통통 하는 앙증맞은 발걸음이었다면 공격 직전에는 체중을 잔뜩 실어 도움닫기를 하다 보니 쾅! 하며 어이없을 정도로 큰 소리가 난다. 이것은 주로 검도를 배웠던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인데 이런 공격은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어가 된다. 힘으로 밀고 들어가는 연속 공격이 허용되지 않는 펜싱에선 절대 조심해야 하는 동작이다.


 두 번째는 노골적인 예비동작이다. 찌르는 속도가 늦어서 공격이 쉽게 막힌다고 생각하는 경우, 공격 직전에 힘을 모으며 몸을 웅크리거나 팔을 빼는 예비 동작을 취하게 된다. 이것은 첫 번째 실수와 마찬가지로 방어자에게 '나 이제 공격하오~'하고 사전 고지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기본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순간적으로 박자를 바꾸고 리듬을 꺾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느리게 접근하여 빠르게 공격하는 것은 1단계, 빠르게 접근하여 느리게 공격하는 것은 2단계이다. 그리고 단계가 올라갈수록 이동과 공격 사이에 시간차 모션을 끼워 넣어 상대를 헷갈리게 만든다. 우선권이라는 특이한 규칙이 있는 플러레의 경우 공격자에게 단 한 번의 공격만 허용하기 때문에 단 번에 득점에 성공하기 위해 손과 발, 어깨와 무릎, 필요하다면 입술이나 눈썹까지 모조리 이용하여 짧은 순간 많은 페인트 동작을 섞어 넣는다.


빠른 페인트에 이은 깔끔한 공격





 

 이런 리듬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공격자는 자신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시합 중에 코치들이 '너의 펜싱을 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것은 내가 자신 있는 거리에서 싸우라는 뜻이다. 성질이 급한 선수는 시작과 동시에 달려 나가는데 노련한 상대를 만나면 아무것도 못하고 순식간에 시합이 끝나버린다. 이것은 내가 공격에 유리한 거리가 아니라 방어 유리한 거리에서 싸웠다는 뜻이다. 내 공격이 먹히지 않아 흥분한 나머지 상대에게 더 근접해 공격을 시도하다 벌어지는 일이다.


공격이 시작될 때를 노려 역습을 하는 장면


 노련한 선수는 흥분한 상대를 조용히 끌어들인다. 지친 듯 겁먹은 듯 반 템포쯤 느리게 후퇴를 하며 상대를 유인한다. 공격자가 방어자의 거리를 뚫고 자신의 거리를 완벽하게 확보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공격자가 공격을 시작하는 순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역습을 시도한다.


 거리를 잃으면 시합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운다. 거리를 잃은 선수는 허공을 찌르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신감이 꺾인 선수는 공격도 방어도 아닌 어중간한 동작만 반복하다 끝나게 된다.


 나의 거리를 확보하려면 먼저 나의 거리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시합은 '닭치고 공격'만으로 이겼다고 다음 시합에서도 이길 것이라 생각해서 안된다. 시합에서 거리를 확보했다면 끝날 때까지 그 감각을 유지하며 상대를 압도하자. 상대 선수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꽁꽁 묶어 버리자. 그렇게 되면 마지막 포인트는 걸어가서 콕 찔러 끝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펜싱이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스포츠는 크게 점수가 벌어지면 따라잡는 게 거의 불가능하지만 펜싱은 그렇지 않다. 노련한 방어로 공격의 의지를 꺾은 뒤 차근차근 역전해 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타고난 재능이 없더라도 노력과 연구와 경험만으로 강한 상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에 따라, 남은 시간에 따라, 점수 차에 따라 수시로 전술을 변경해 가며 역전에 재역전이 거듭하는 스포츠이다.


 펜싱은 3분, 3회전, 총 9분 동안 시합을 치른다. 당신이 펜싱을 시작한다는 것은 9분짜리 액션 영화에 공동 주연으로 출연하는 것이다. 멋진 한 컷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가. 당신의 피나는 노력도 피스트 위에서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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