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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Apr 10. 2022

나의 책장을 소개합니다.

내가 읽고 나를 읽어주던 책들


“기분이 없는 기분이야.”​


기분이 어때라는 물음에  아이가 답했다. <기분이 없는 기분>  미워하던 아빠가 고독사로 생을 마감하고 우울증을 겪은 딸의 이야기다. 가슴  명치께를 밑돌던 아이가 여덟살이 되자 가슴팍까지 자랐다. 심심할  책장 주위를 어슬렁 대면서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고 제목을 살피더니 이렇게 종종 대답하기 귀찮은 나의 질문에 책의 제목을 말할 때가 있다.  옆에는 <취하면 괴물이 되는 아빠가 싫다> 기쿠치 마리코의 만화책. 알코올 중독 아빠로부터 시작된 가족의 붕괴를 그렸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으로 인해 겪는 갈등.  역시 이런 가족을 가졌던 이력 때문인지 이런 책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없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필요로 하는 부모라는 존재로부터 받는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고통. 그것이 어린 자녀에게 주는 양가감정, 고립감, 자기혐오 같은 것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안에 존재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재현되면서 내가 느낀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느낀다. 다르지만 비슷하게 고통받고 아파한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 고통이 고통으로 위로 받는 순간이다. ​


내가 사랑한 소설 그리고 작가


아이들이 커가면서 책장 속 그들의 지분이 늘어났다. 아래 두 칸만 차지하던 아이들 책이 어느 새 책장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알록달록한 그들의 책 위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며 버티고 있는 나의 책들. 김연수는 시대의 비극을 쓰는 사람이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운동단체 안에서 벌어진 동족 간의 학살의 이야기가 <밤은 노래한다> 에 담겨있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3년 간 만주에서 숙식을 하며 기록된 역사 이외에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던 당시의 사건을 재현해냈다. 그리고 최근 그가 낸 신간 <일곱 해의 마지막> 에서는 문학의 존재 이유를 체제 유지 수단으로만 보는 북한이라는 국가에 살았던 시인 백석의 삶을 그렸다. 이 소설을 쓰면서 그 시대의 가곡을 들었다고 한다. 가곡을 들으며 쓰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과 이북 땅에서의 그의 흔적를 재구성했다. ​


그리고 그런 김연수 작가를 살아 생전에 예뻐했다던 박완서 작가의 책들. 나목, 엄마의 말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의 소설에는 그가 스무살에 경험한 한국전쟁과 오빠의 죽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PX에서 일한 일들이 자주 등장한다. 전쟁통에 겪은 무섭고 혹독한 추위와 가난, 그것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그녀의 몸과 마음. 그의 작품 곳곳에 존재하며 그 맥을 잇는 불행 속에서 묘한 생명력을 찾아볼 수 있다. 불행 덕분에 보이는 것 불행해서 볼 수밖에 없는 것들, 불행 덕분에 비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답답함과 그 속에서 솟구치는 자기 표현의 열망 같은 것들. 마흔이 넘어 등단한 이후 일년에 한 편 이상의 작품들을 펴낸 다작의 힘은 다름 아닌 그의 상처가 아니었을지 짐작해본다. ​


그 소설가들이 쓴 산문집들도 있다. 이야기를 잘 짓는 이들은 자기 이야기도 어쩜 그리 잘 쓰는 지. 그들의 에세이에서 소설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작가의 사생활이나 직접적인 생각들을 발견할 때 느끼는 친밀감이 이토록 좋을 수가 없다. 작가의 이런 면이 혹은 이런 과거가 소설에 이렇게 또는 저렇게 투영된건가 하는 상상은 즐거운 일이다. ​


그 책들 사이로 에메랄드색 바탕에 검은색 궁서체로 쓰인 ‘채공녀 강주룡’. 사랑하는 남편이 독립된 나라에서 살기 원하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 독립운동을 하고 나중에는 노동운동으로 자신의 삶을 던진 멋진 여자 주룡의 이야기. ​


나를 먼저 사랑하라고 말해주던 육아서


손이 겨우 닿는 책장  위에는 육아서들이 있다. 아이를 낳고 좋은 어른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일관성 있는 양육자, 나의 감정을 자녀에게로 던지지 않고 스스로 처리하는 어른. 하지만 경험하지 않은 , 게다가 형체가 없는 것들을  구성해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육아는 중간에 도망가거나 포기할  일이 아닌   자체였기에 언제나 항상 아이들 앞에   밖에 없었고 부족한 나를 끊임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 나이에 갑작스레 맡게  엄마라는 역할에 메이고 짓눌릴  나를 구원해주던 책들. 더하는  보다 빼는 것이 중요한  육아이고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전제임을 끊임없이 말하던 책들.


쓰는 사람으로

읽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차 쓰는 사람으로도 그 영역을 확장해갔다. 내가 쓰는 글, 기억을 복원하고 상처를 꺼내는 자기 해소와 발설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글들에 회의가 들었다. 도무지 내 글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 기댄 책들이 있다. ​


치유하는 글쓰기, 글쓰며 사는 삶, 글쓰기의 최전선,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칼같은 글쓰기. ​


 글의 쓸모를 찾고 싶은 마음의 개수만큼 글쓰기에 대한 책들의 개수도 늘어났다. 내면적인 것은 언제나 항상 사회적이라는, 순수한 자아에 타인과 , 역사가 존재하지 않을  없다는 아니 에르노의 문장. 글쓰는 일이 작가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소수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이 선택하는 최소한의 권리 라는 은유의 말들에 기대어 글쓰기를 지속할 힘을 얻었다.


내가 읽고 또 나를 읽어주던 책들

나의 한 시절을 위로해주며 내가 읽고 나를 읽어주던 책들이. 하지만 동시에 나를 외롭게 했던 책들. 사유가 촘촘하고 단단한 문장들을 읽을 때면 설레기도 했지만 내가 쓰는 글의 얕음이 지난 날 왠지 게으르게 살아왔다는 증거인듯 하여 내 지난 시간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땐 작가가 아닌 독자로 남아있음이 다행이란 생각이 스친다. 그렇게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도 만들고 한없이 벅차오르게 했던 문장들이 내 몸에 남아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확히 어떤 구절 어떤 의미였는지 희미해지지만 내 안에 남아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이끄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쉽지 않고 고된 길. 좋지만은 않은 길. 하지만 꼭 가야할 곳. 그곳으로 이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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