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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May 04. 2022

저녁과 밤의 경계에서

나는 내가 버겁다


여름이 가까워졌다. 해가 늦게 진다. 언제 지나 싶다가도 어느새 없어지는 해. 어둑어둑해지는 이 저녁과 밤의 경계는 늘 낯설고 이질적이다. 저녁도 밤도 낮도 아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시간.


수백만년을 자연에서 살아온 사피엔스에게 밤은 춥고 괴로웠던 시간이었겠지. 불이 발명되고 나서도 한동안 밤은 냉혹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맹수에게서 피붙이를 잃고 밤이 몰고 온 추위에 몸을 떨고 이유도 모른채 찾아온 태양의 부재에 무방비 상태로 남았을테니까. 그 시간의 흔적이 내 안에 겹겹이 쌓여서인지 아니면 어릴 적 밤이 시작되는 경계에서 느꼈던 지독한 고독감이 올라오는 것인지. 퇴근하고 아이들을 챙기고 저녁을 먹이고 치우고 정신없는 와중에 울음까지 터진다.


네 살 아이에게 말한다. “현이야 엄마 안아주세요.” 그럴 때면 아이는 이유를 묻지 않고 별다른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벼운 팔을 내 어깨에 올린 채 내 목을 감싸 안고 속삭인다. 엄마 사랑해요. 조금만 힘을 주어 꺾어도 부러질듯한 여리여리한 아이의 팔뚝 무게를 어깨로 느끼고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을 볼로 느끼며 눈을 꼬옥 감는다. 다시 일어서서 행주를 빨고 식탁 위를 닦고 아이가 먹으면서 바닥에 흘린 김자반을 모아 버리는데 울음이 또다시 목젖까지 밀려온다. 이유를 모르는 울음. 어른이 된 후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이렇게 이유를 모르는 것들이었다.


시퍼런 저녁이 서늘한 공기를 머금고 내 시야를 감쌀 때면 창문 너머로 더이상 밝은 빛이 보이지 않고 그림자 조차 모습을 숨길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 내가 가진 생각과 모든 마음들을 나누고 싶다. 기쁨 슬픔 고독 어려움 남김 없이.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누군가가 잠깐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고 싶다. 그와 하나가 되고 싶다.


나는 늘 거리 조절에 실패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지도 모르면서 덜컥. 지금 나를 압도하는 공허와 고독감을 덮으려고 덜컥. 그것이 해결해주는 것이 실은 아무 것도 없는데. 오히려 그것이 또 다른 공허와 지독한 후회같은 것들을 몰고 올지도 모르는데. 내 안에 움푹 패인 그 늪을 채우려고만 하다보니 나도 이 마음도 자꾸만 그 늪에서 허우적댄다.


누구나 이런 구멍을 마음 가운데 안고 사는걸까. 이 구멍의 깊이가 가늠이 되질 않아 두렵다. 깊으면 깊은대로 이 깊음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서 얕으면 얕은대로 생각보다 얕으면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보잘 것 없는 것이 될까봐. 내 근원이 담긴 내 존재의 어떠함이 담긴 그 깊은 곳에 뚫린 구멍에서 종종 목구멍까지 길이 트일 때면 여기로  터져오르는 울음을 아이 앞에서도 주체할 수가 없다. 이런 감정 하나도 컨트롤 하지 못하는 엄마라니, 라는 자책이 따라온다.


어릴  엄마를 기다리며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안방에서 티브이를 보았다. 그러다 지루함을 참지 못할 때면 할머니에게 천원짜리 지폐를 받아다가 가게에 가서 장난감을 샀다. 그럴   이삼백원이 모자랐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선 할머니가  지폐와  지갑  동전 사오백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장난감 안에는 쿠키나 젤리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으나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잠시동안이라도 집중할 어떤 것이 생겼다는 기대감도 잠시였다. 슈퍼에서 파는 장난감들은 왜이렇게 하나같이 조악하고 조립하기 쉬운건지. 왜 30분 이상을 가지고 놀 수 없는 지. 장난감을 조립하며 집중했던 시간이 길수록 조립을 완성한 후 느끼는 막막함도 커졌다. 이걸 다 맞췄는데도 엄마가 오질 않잖아. 나는 이제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뭘 해야 할까. 그들 옆에서 이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하지. 이제 겨우 할머니가 좋아하는 6시 내고향이 끝났고 만화는 더이상 나오질 않는데. 저녁9시 뉴스가 곧 할테고 이불을 깔고 누워 멀뚱멀뚱 티브이를 바라보기만 해야할텐데. 기대되는 것이 없어서 실망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괜찮은 것도 아니었던 날들.


글자를 수월하게 읽기 시작한 4학년 이후부터는 방에 꽂힌 삼국유사라든가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읽기라도 했지만 그 전에는 할 게 너무 없었다. 나는 이런 시간을 살아야 하고 견뎌야 하는 아이라는 생각을 무력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엄마가 집에 있는 날들이면 엄마가 차린 저녁밥을 야무지게 먹고 엄마가 씻겨주는 손길을 포만감 가득 느끼고 내 머리를 말려주는 엄마의 손끝에 묻은 사랑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리고 장난감을 사러 가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엄마와 저녁 산책을 나갔다. 머리카락에 물기를 머금은 채로 맞는 밤바람의 느낌. 집에서 나와 길을 건너고 가로등이 하나만 켜진 주황 불빛의 어두운 골목을 지나 불이 하얗게 켜진 시장을 갔다. 시장에 가지 않는 날이면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았다. 우리 말고도 저녁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한 방향으로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종종 친구들을 우연히 만났는데 이런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만난 친구들은 더 반가웠고 엄마가 있어서 그들과 더 이야기 하지 못하고 놀지 못하는 상황은 감칠맛이 났다.


그 시간들이 가졌던 비슷한 특징들이 지금 내가 지나는 시간에 고스란히 재현되어서인지 매일 마다 오는 저녁과 밤의 경계에 울적할 때면 울적으로 끝나지 않고 꼭 눈물도 나고 슬픈 생각도 많이 나고 엄마 생각도 난다. 보고싶은 것도 아니면서 그리운 느낌이 버겁다.


“엄마 왜 눈물이 나” 아이의 물음에 “눈을 많이 비벼서 눈이 따가워. 아야 아야.”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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