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Dec 27. 2024

침묵하는 신을 불러봅니다

성탄절에 읽은 글

스물한 살 저는 많이 아팠습니다. 청소년 시절 엄마를 돌봐야했던 제게 사춘기가 뒤늦게 온 것 같았습니다.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었고 깨어 있던 낮에는 수업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세 시간짜리 수업 중 주어진 15분의 쉬는 시간,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려고 책상에 엎드려 있자 바로 가위가 눌렸고 복도로 나와 펑펑 울었습니다.


왜 내게는 평안이 허락되지 않는지 원망하는 마음, 내 몸과 마음이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느낌.


수업이 끝나고 밖에 나가자 건물 밖에는 제가 아는 언니가 서 있었습니다. 활짝 편 샛노란 해바라기 한송이를 제 쪽으로 들고선 절 보고 웃고 있었어요. 선교단체에서 저를 양육했던 두 학번 선배였습니다. 제가 요즘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취업 준비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 학교에 들러 꽃을 사 제 수업이 끝나기까지 기다렸던 겁니다.


그 해바라기는 지금껏 제 마음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지치고 힘이 들 때, 내 자신인 내가 싫어 다 포기하고 싶을 때면 그날 오후 저를 비춰주던 그 해바라기 한 송이를 떠올립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렸던 스물세살 언니의 그 위로는 제가 한 시절을 버틸 수 있도록 제 마음을 비춰주었습니다. 시험 기간이면 저를 재워주던 선교단체 언니들, 제가 취업 준비한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알바한 돈으로 시험료를 내주고 밥을 사주던 언니 오빠들. 나 스스로도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괴로웠는데 저를 사랑한다고, 하나님께서 너를 책임져주신다 말하며 나를 책임지려 했던 그 어린 스물 세살, 네살의 앳된 어른들이 제게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의지하며 긍정적으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나 잔인했고 제게는 의문투성이였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인재로 인해서, 돈을 아끼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혹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이들 때문에 참사를 겪어야 했고 결국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 어린 친구들이 죽었습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은 인종 청소와 같은 학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미사일과 폭탄으로 가장 먼저 학교와 병원과 난민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미 승패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쳐 가족을 잃고 있습니다. 위험한 현장에서는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으며, 그들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나서 자랐지만 곧 추방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계시긴 한겁니까. 저는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까봐 두렸습니다. 무고한 자들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언제까지 세상은 생명보다 돈에, 가치보다 이득에 우선순위를 둔 채 이렇게 흘러가야 할까요.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저는 늘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삽니다. 하나님 계십니까.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에 마음이 급해져올 때면 서둘러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눈물에 젖어 축축한 곳, 아픔과 비통함이 고여 있어 그 누구도 기피하던 곳에 발을 내딛었던 그 분을 떠올립니다.

분명히 주님은 그곳에 계셨을 것이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매일매일 그들과 함께 매순간 죽임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다시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아 저는 또 무력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때 피어오른 물음이 있습니다.


국희야 너는 너에게 주어진 이 생을, 이 삶을 어떤 자리에 위치시킬 것이니?


너는,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할 것이고 너의 시간을 누구와 쓸 것이니?


이렇게 저에게 물으시는 것만 같습니다.


재해와 참사, 전쟁과 기근과 같은 큰 문제들로 제가 압도되고 있을 때 주님은 제게 묻습니다.


내가 네 곁에 보내준 이들과 함께 할 것이냐, 정말 그래 줄래? 라고요.


문제와 상황에 압도되어 나를 이끄시고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나를 빚으셨던 그 분이 보이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럴 때면 제게 해바라기 꽃을 사다주고, 회사 최종 면접 전날 “너는 그대로가 빛나, 하나님이 보신다고 생각하고 회사 임원들의 눈에 들려고 하지 말고, 너대로 대답해.” 라고 말해준 선배. “너는 이미 귀한데, 너 되게 훌륭한 아이야.”라고 말해준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이런 사랑과 돌봄을 받은 내가 이것들을 나누어주고 있는지 되돌아보면서요. 그리고 여전히 저는 또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듣고 있는 것 맞습니까, 라면서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의 끝이 어디를 향할지는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의심하고 찾아 나가는 이것이 제가 믿는 방법이며 앞으로 저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끝없이 반복될 문장들입니다.


마이크를 쥔다는 것은 그것이 5분이 됐든 10분이 됐든 권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 지 큰 책임을 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끝나기 전 떠올랐던 모습들을 말하고 싶습니다.


회사 출근길에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지하철 점거시위를 하다 끌려나간 전장연의 휠체어와 그들의 맨몸, 이주민 노동자들이 머물렀던 비닐하우스 기숙사가, 담요가 없어 덜덜 떠는 팔레스타인의 노인과 어린 아이들, 대부업체의 백만원이라는 돈을 빌린 지 한 달 만에 불법 추심으로 목숨을 끊은 여섯살 짜리 아이 엄마 지혜씨, 전세사기로 돈을 잃고 목숨을 저버린 청년들.


언제나 우리의 기도와 외침은 참 미약해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듣고 혹시라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모습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모아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지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한 시절을 환하게 비춰주는 해바라기가 될 수 있도록.


메리크리스마스.



성탄절, 교회에서 낭독한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