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유리창에 깨금발로 점을 찍었다. 차는 유치원 근방에 다다랐다. 둘째는 올해 일곱 살 남아로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이를 태우고 곧바로 학교 인근에 있는 보습학원으로 핸들을 꺾었다. 학원 건물 앞에서 첫째가 손을 흔들며 나를 향해 미소를 던졌다. 첫째는 초등학교 육 학년 남자아이였다. 차에 탄 걸 확인한 후에 아이에게 물었다. 간식 먹었니? 첫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첫째는 늘 그랬듯이 내게 스마트폰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첫째는 요즘 역사 다큐멘터리에 푹 빠져 있었다. 학원 일정 때문에 다큐멘터리 볼 시간이 없는 그 마음을 헤아려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스마트폰 스피커에서 해설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째가 그걸 보고 가만있지 않았다. 형만 스마트폰을 준다고 징징거렸다. 둘째의 울먹거리는 소리를 멀리하려 딴생각을 하던 중, 기억 저편 어딘가에 숨어 있던 학창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학원을 보내 달라고 떼쓰던 그날이 자동차 유리창에 스크린처럼 펼쳐졌다. 그날, 엄마는 그만 좀 하라고, 내게 소리 질렀다. 그날, 엄마가 그랬듯이 둘째에게 그만하라고 소리 질렀다. 순간 둘째는 놀랐는지 이내 조용했다. 자동차 룸미러로 둘째의 얼굴을 살피니,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고집을 피워봤자 소용없다고 체념한 듯 둘째는 형아 옆에 바짝 붙어 스마트폰에 시선을 박았다. 그 모습이 안쓰럽게 여겨지면서도, 열네 살 때 겪었던 서글픈 감정이 되살아나 애써 무관심한 척했다. 첫째는 이 모든 상황을 그저 관망하는 태도로 조용히 있다가 말을 걸었다. 엄마, 나 팝송 틀어줘. 나는 팝송을 재생시켰다. 미국 팝가수 존 덴버의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가 흘러나왔다. 첫째는 가사를 흥얼거렸다. 둘째도 옹알옹알 조금씩 따라 불렀다. 그사이 가늘게 내리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면서 장대비로 변했다. 차는 어느덧 시내와 외곽을 연결하는 천안시 취암산 터널에 진입했다. 그런데 도로 위에서 달리던 차량이 점차 속도를 줄이며 차량 꽁무니에 빨간 등을 밝혔다. 터널은 빨간 불을 밝힌 차들로 가득했다. 정체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터널 끝에 희미하게 보이던 하얀 불빛, 그 빛이 평소 이 길의 등대처럼 보였다. 그러나 앞차에 가려선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막연히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답답한지 자꾸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사고 났어요? 첫째가 물었다. 글쎄, 엄마도 잘 모르겠어. 둘째는 빨리 가자! 라며 투덜거렸다. 막막하고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른이기에 나는 아이들처럼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냥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터널 안에는 사다리처럼 이어진 LED 전구가 천장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순찰차의 경광등을 모방한 파란색과 빨간색 불빛이 시멘트 벽면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반대편 차선에는 사이렌이 평소보다 더 크게 울리며 귀 천장을 때렸다. 앞차가 움직일 때까지 내 차는 가만히 있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유튜브를 보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그 순간 나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고 팝송을 들으며 가사의 뜻을 음미했다.
나는 아직도 나의 길이 무엇인가?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타고난 지능, 특출한 재능 하나 없어,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위기를 벗어나려면 결혼을 해서 팔자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난 때문에 딸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는 부모님의 한숨은 내 인생의 멍에였다. 그래서 경제력 있는 남자와 결혼하면 내 꿈을 이룰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연애 시절에 다양한 남자를 만났다. 내 기준에 부합되는 남자가 아니면 과감히 헤어졌다. 결국, 경제력과 지성을 갖춘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생활은 안정적이었고, 그 틈을 노려 인문학 강사를 꿈꿨다. 학문에 대한 목마름이 커서 기회가 되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 와중에 아이가 생겼고, 출산과 함께 꿈도 잠시 내려놓았다. 아내와 엄마로 살아가야 하는 책임감이 나를 짓눌렀고, 마음을 헛헛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나의 소임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는 않았다. 첫째를 키우면서 사랑을 듬뿍 주려고 노력했다. 다만 어느 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때 못 배운 한, 그 결핍이 욕망으로 드러난다는 걸 알았다. 그 대상이 바로 첫째 아들이었다. 첫째를 내 욕망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사교육 장으로 밀어 넣었다. 둘째 아들을 낳고 첫째와는 다르게 매정하게 대했다. 편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섯 살 터울이라는 나이도 있었지만, 유년 시절 첫째였음에도 둘째에게 부모의 사랑을 빼앗긴 내 마음속 설움으로 인해 둘째를 남동생으로 투사하고 미운 감정을 가졌다. 되돌아보니 엄마로서 참 못 할 짓이었다.
첫째는 빡빡한 일과를 보냈다. 영수학원은 기본으로 매일 다녔고, 틈틈이 드럼 학원과 탁구 학원에 다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컴퓨터학원과 논술학원까지 꼬박꼬박 다녔다. 아이가 집에 오면 저녁 여덟 시였다. 시키는 대로 학원을 잘 다녀주어 첫째가 한없이 고마웠다. 오후가 되면 택시 기사처럼 시내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운전하는 나는 길 위의 여자였다. 현재 아이들이 경쟁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누구보다도 많이 배워야 하고, 많이 경험해야 한다. 좋은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고 능력도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 먹고사는 문제로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 교육 관념이다.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그런 삶은 후회만 남는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엄마로서의 사랑은 이게 어쩌면 최선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거침없이 매일 길 위를 달렸다.
정체가 풀렸는지 내 앞의 소형차가 움직였다. 액셀을 다시 밟고 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터널 끝부분에 사고 차량과 견인차가 세워져 있었다. 아이들도 다시 자동차가 움직이자 표정이 밟아졌다. 터널 밖으로 장대비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다음 목적지는 드럼 학원이었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학원 선생님께 늦는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도로 사정이 안 좋아 시간을 놓치면 교습받지 못한 시간이 아까워 종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첫째는 드럼을 통해 스트레스를 날렸다. 어떤 악기든 하나는 배워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이가 드럼을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작년 겨울에 첫째가 무대에 올라가 드럼 발표회를 했을 때, 가졌던 뿌듯함이란 부모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었다. 첫째를 내려주고 나면 둘째는 똑같은 레퍼토리로 말한다. 엄마, 나도 학원 다니고 싶다고. 십 대에 가졌던 나의 질투와 시기는 어쩌면 일곱 살 아이가 말하는 저 투덜거림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룸미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당장 내일 학원 등록하러 가자. 둘째의 표정이 밝아졌다. 첫째 학원 보낼 때마다 차 안에서 함께 했던 둘째 아이의 고충, 모르는 거 아니었다. 길 위에서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하게 보냈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둘째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던가. 첫째를 학원에 집어넣고 난 후, 둘째가 없었더라면 더 헛헛했을지 모른다. 둘째를 첫째와 다르게 사교육에 일찍 넣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어쩌면 조금 더 둘째와 함께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지금 둘째가 저렇게 학원 보내 달라고 아우성칠 때, 그 욕구를 들어주는 부모가 제일 좋은 부모가 아닐까 싶다. 나의 부모님은 그 욕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나의 부모님과 달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이가 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지 않는 것, 그게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현명한 자세였다.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 존 덴버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다. 차 유리창에 빗방울이 거세게 쏟아졌다. 와이퍼 세기 버튼을 중간 단계로 올린다는 게 그만 최고 단계로 올렸다. 그러자 와이퍼가 메트로놈처럼 잽싸게 움직였다. 그 광경을 보던 둘째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이외의 반응에 나는 장난 삼아 버튼을 올리고 내렸다. 둘째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아이 웃음소리였다.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둘째 아이 눈과 마주했다. 팝송 가사를 크게 따라 불렀다. 아이도 신나는지 목청껏 크게 불렀다. 아이와 나는 한참을 그렇게 놀았다. 그 사이 빗줄기는 차츰 가늘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