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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소이 Oct 22. 2021

그리운 완행열차

   차는 21번 국도에 진입했다. KTX 천안아산역이 멀리 보였다. 차도는 8차선으로 넓게 뚫렸다. 며칠 전 평소 좋아하던 문학작품이 연극으로 나와 표를 예약했다. 아산시에 있는 공연장으로 달렸다. 늑장을 피워 속력을 올렸다. 오후 햇살이 날카로웠다. 가을의 문턱인 9월이 왔지만, 신록은 푸르기만 했다. 배방읍 장재리를 지날 무렵이었다. 장재리는 90년대 초반 평야가 넓게 펼쳐진 시골 동네였다. 그곳은 지금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마을을 가로질러 달리던 장항선은 온데간데없다. 그 무렵 잠시 잊고 지낸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칙, 폭, 칙칙폭폭”

  어릴 적 여자아이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을 잡고 기차놀이를 했다. 고무줄 기차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돌고, 아이들 마음속에 풍선처럼 꿈을 부풀렸다. 그러나 자라면서 기차 타는 일은 없었다. 가족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매일 일하고, 먹고사는 데만 열을 올렸다. 여행과 낭만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그즈음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정말 우연찮게 기차는 내게로 왔다.

  벚꽃 잎이 눈부시게 피어나던 사월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이 지나다녔다. 철길은 심혈관처럼 그어졌고, 그 위를 심장처럼 지키는 간이역이 있었다. 지금은 간이역이 발전해서 전철이 다닌다. 나는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타고 온양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기차를 타고 다니기 전에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탔다. 온양까지 완행열차가 다닌다는 말을 지인에게 처음 듣던 날뛸 듯이 기뻤다. 교통비도 절감했고, 시간도 단축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기차를 탄다는 마음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으스름달이 시뻘겋게 알몸인 새벽, 나는 책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가방을 멨다. 봄이었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집을 나서며 멀리 기적 소리를 귓가에 담았다. 집에서 역까지는 도보로 삼십 분이 걸렸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이 힘들지 않았다. 애인을 지척에 둔 것 마냥 걸음을 재촉했다. 간이역에 다다라서 미닫이문을 열면, 문이 삐걱거렸다. 나사가 빠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매캐한 담배 향이 코에 닿았다. 한기가 얼굴에 닿고, 기찻길 옆으로 늘어선 벚나무들이 한기를 몰아내었다. 동이 터 오고 빛이 뿜어졌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벚꽃 잎들이 일제히 찰랑거렸다. 역 안에서는 재떨이에 재를 떨며 기차를 기다리는 벙거지 모자를 쓴 오십 대 중년 남성과 머리에 짐 보따리를 이고 장터에 물건을 팔러 가는 육십 대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말끔하게 작업복을 입은 역무원이 사무실에서 나왔다. 역무원은 겨드랑이에 꽂고 있던 깃발을 흔들었다. 초록 깃발과 빨간 깃발이 들려질 때마다 무궁화호와 새마을호가 바람처럼 획 지나갔다. 이윽고 완행열차가 플랫폼 안으로 들어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듯이 증기를 내뿜으며 정차를 한다. 사람들이 기차에 올랐다.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남루하거나 초라했다. 좁은 틈이라도 있다면 껴서라도 토막잠을 잤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상인이었다. 사월의 봄은 상인들 마음에 봄바람을 불어넣지 않았다. 보따리를 품에 꼭 끌어안고 목적지가 가깝기만을 꿈꾸는 그들의 무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열차가 움직였다. 열차는 천안역에서 한 차례 머물다 갔다.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대부분 천안에서 내렸다. 모두가 어딘가로 왔다가 가기 바빴다. 기차에 관한 나름대로 환상이 컸던 나로서는 기차야말로 여행을 위한 교통수단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상인들은 생계를 위한 이동 수단으로 기차가 큰 몫을 해냈다. 자기 삶을 유지해 가기 위한 몸부림. 그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열일곱 소녀가 이해하기에는 추하고 안타깝게 보였다. 기차가 한낱 가난한 이들의 이동 수단이라니? 삶의 애환이니, 아름다움을 논하기 이전에 낭만을 깨뜨리는 교통수단으로밖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완행열차, 비둘기 호라는 명칭부터가 서민들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와닿았지만 나는 그런 느낌부터가 싫었다. 기차에도 계급과 명예가 주어지기 전에 그냥 기차라는 이름, 그 고유한 본질의 모습을 찾고 싶었다. 상인들이 내릴 때마다 아스라이 다가오는 가난한 이미지들, 그걸 떼놓고 완행열차가 주는 아름다움에 빠져보려고 나는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완행, 느림이라는 이미지를 품은 기차, 그 이미지를 몽상 속에 넣고, 열일곱 살 소녀는 낭만을 노래하고 싶었다.

  입시라는 관문이 학교 교문을 넘어서면 나를 기다렸지만, 나는 기차 안에서만큼은 책과 함께 했다. 시험기간에는 문제집을 보면서도 창밖 너머 풍경을 마주했고, 주말을 건너뛴 월요일에는 평소보다 승객이 많아져서 와글거리던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읽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기도 했다. 그런 감상에 빠져있다가도 나는 우울했다. 봄날에 찾아오는 꽃샘추위처럼 마음속 응어리가 깊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온양으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을 탐탁잖게 여겼다. 천안에도 좋은 인문계 고등학교가 있는데, 왜 하필 온양이냐며 입학원서를 써주지 않았다. 똥통 학교라며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딸내미라고 핀잔을 주었다. 나의 중학교 성적은 중간에서 맴돌았다. 90년대 초반, 천안에는 인문계 여자 고등학교가 두 군데밖에 없었다. 나의 성적으로는 입학할 수 없었다. 상업계 고등학교에 갈까도 망설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대학이라는 곳이 꿈처럼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은 갈 것이다. 이 자부심 하나로 상업계는 지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온양에 있는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학기 초에는 죄인인 것 마냥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녔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보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다른 구차한 변명은 필요 없다. 학교에 다니면서 군말 없이 지내자. 그래도 아버지께 나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도 내 성적은 중간에서 머물렀다. 미래가 불투명한 나는 눈 밖에 난 쓸모없는 딸이었다. 마침 천안 시내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막냇동생은 전교 1, 2등을 했다. 부모님은 그런 막냇동생을 예뻐해 주셨다. 질투는 내 안에서 싹텄다. 공부가 아닌 다른 재주로 부모님께 인정을 받자. 마침 그 와중에 나는 교내에서 실시하는 글짓기 대회를 관심 있어했다. 실력이 좋든 좋지 않던 일단 참여했다. 몇 번 입상할 기회를 놓치고 나서부터 글쓰기에 매진했다. 반년 뒤부터 나는 입상을 했다. 그리고 기회가 되는대로 대회에 나갔다. 자신감이 생기면서 장래에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게 가졌다. 그리고 상장을 부모님 앞에 보여드렸다. 대학에 가서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머니는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지만, 아버지는 나를 돌보듯 했다.

  “세상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철학. 둘째 문학. 셋째가 딴따라다. 돈이 안 되는 그런 것들을 해서 뭐하려고 해. 나중에 뭐 먹고살려고. 이런 거 백날 가져와봤자 아무 소용없다. 졸업이나 무사히 마치고 시집이나 가.” 

  나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미웠다. 그 아픔이 깊어질 때 기차를 만났다. 비둘기호를 타고 가는 시간만큼은 내가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내 꿈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기차는 내 몸처럼 뜨겁고, 친절하고 애틋한 친구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비둘기호는 이용하는 승객수가 나날이 줄었다. 결국 염려는 현실이 되었다. 

  다음 해, 비둘기호는 운행이 중단되었다. 기차를 탈 수 없음과 동시에 나의 여고 생활은 또다시 우울했다. 등하교는 다시 버스로 이어지고, 지각을 밥 먹듯이 했다. 남들 다하는 보충수업은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등교 시간을 아홉 시로 맞췄다.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나를 따돌렸다. 보충수업 면제받고 지각하는 년, 선생 앞에서 알랑방귀 뀌는 년, 뭔가 특별대우받으려는 년, 그렇게 내 이미지는 나쁜 년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나는 묵묵히 학교에 다녔다. 그 와중에 내 친구는 오로지 글밖에 없었다. 틈나는 대로 내 마음을 종이에 적었다. 안타까운 게 있었다면 완행열차 비둘기호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게 아플 뿐이었다. 그리고 비둘기호와의 인연은 거기서 접었다. 

  차는 아산 시내에 진입했다. 아산시 외곽에 있던 여고는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여고시절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학교에 다녔던 여고시절, 그 위축되었던 마음이 아직도 액자처럼 걸려 있다. 지금은 강산이 두 번 바뀌었지만, 여전히 제도권에 들지 못하면 인간은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다 얼마 전에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천안에 있는 고등학교가 모두 평준화를 한다는 사실이다. 성적순으로 학생들을 학교로 내보는 것이 아닌,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학교를 보내는 것이 우선시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명문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고등학교에 보내야 학생들의 미래가 보장된다고 어른들은 믿는다. 그리고 너도나도 그 대열에 들어가기 위해 사교육을 들여 학원을 보낸다. 제도권에 들어가지 못한 실패자들, 즉 패배자들은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사회는 그런 패배자들을 다 받아주는가? 

  돌이켜볼 때 비둘기호는 내 안에 가능성이라는 꿈을 펼칠 수 있게 만들어준 나래였다. 십 대의 방황을 잡아준 정다운 친구이자, 도피처였고. 내 아픔을 위로해준 치료사였다. 그 후 나는 평소 즐겨 쓰던 글쓰기로 실력을 인정받고 대학에 진학하였다. 아버지는 그 후에도 문학을 전공하는 딸내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그 무관심이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실패자들이 표류하고 있는 요즘, 경쟁이 아닌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각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가치를 인정하는 그런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런 가치 있는 사회에 인문학이 큰 몫을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각했으면 좋겠다. 지금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슬픈지 나는 안다. 그런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기차를 타라고. 느린 기차를 타라고. 그러면 꿈을 갖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고. 머뭇거리고 있다면 지금 당장 떠나라고. 아산을 가로질러 달리던 장항선은 현재 철길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완행열차가 아닌 전철이 서울에서 도고온천까지 달린다. 전철은 값이 저렴하면서도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자리가 부족해서 서서 가는 어려움이 있지만, 다양한 표정과 옷차림을 갖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느림을 배울 수 있다. 

  어느덧 내 차는 공연장에 도착했다. 관람석에 앉고 무대를 보았다. 커튼이 열림과 동시에 배우들이 나왔다. 배우들은 자기 맡은 역에 아주 충실했다. 내 나이 마흔이 가까워온다. 그리고 인생 2막을 꿈꾼다. 무대 위 배우들처럼 당당하고 두려움 없이 큰 목소리를 그런 작가를 꿈꾼다. 조명이 꺼졌다. 음악이 나온다. 어디 선가 열차 달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급히 가지 말고 천천히 2막을 준비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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