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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소이 Oct 22. 2021

격리

  이곳은 섬이다. 몸은 지느러미처럼 흐느적거렸지만, 마음은 헤엄치지 못했다, 여기서는 욕망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물결을 일렁거렸지만,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병동은 삭막한 삶으로 얼룩진 개인의 섬과 섬이 만난 큰 섬이었다. 그들에게는 육지로 닿는 다리가 필요했고, 정신과 주치의들은 등대지기이자, 절실한 다리였다. 등대는 외곽에 없었다. 등대는 안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었다. 큰 거울은 복도 중앙 벽에 걸려 있었다. 그 거울이 유일한 등대였다. 그 안에 모든 빛을 품고,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듯 드나드는 사람 모습을 비췄다. 갑판을 살피는 어부처럼 간호사와 전공의는 몸놀림이 부지런했다.

  아들은 한낮에도 헛것이 보인다고 했다. 열네 살 소년이었다. 평소 다니던 정신과 의원에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았지만,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소견서를 써주었다. 종합병원을 냉큼 찾아갔다. 교수는 뇌 검사를 비롯해 종합심리검사를 받아야 한다며 보름간 입원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당장 결정할 수 없었다. 일단 정신과 입원은 아들에게 첫 경험이었고, 정신과 입원은 감금(?)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머릿속을 채웠다. 아동기 때부터 다니던 정신과 이미지는 긍정적으로 바뀌었지만, 입원은 정신병자로 취급한다는 선입견이 뒤따랐다. 또한, 병동에서 만나는 환자들 상태가 심각해서 아들 정신건강을 더 악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고 노파심도 가졌다. 그러나 결정은 빠를수록 좋았다. 오로지 의사만을 믿고 검사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다음 날 짐을 챙겨 아들과 함께 정신과 병동에 발을 들였다. 병동은 건물 맨 꼭대기에 있었고, 입원실 창문에는 쇠창살이 있었다. 드나드는 문초자 철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아무리 두려움을 떨치려 해도 폐쇄적인 병동의 모습 앞에서 나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창밖으로는 만발한 벚꽃이 산호초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혹독한 봄날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현상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병동 안에 환자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다. 마스크는 인간관계마저 차단했다. 종합병원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었다. 개인 건강 이상 유무와 열 체크는 꼼꼼히 따졌다. 병원 관계자들은 멸균 복을 입고 의심과 감시의 눈으로 경계했다. 열화상 카메라를 통과했을 때, 나는 바다를 표류하다 섬에 도착한 사람처럼 안도감이 들었다. 멸균 작업은 철저했다. 병동에 오기 전, 목이 약간 따끔거렸다. 기침과 열은 없었다. 병실에서 되도록 나가지 않으려 했다. 뜨거운 물을 계속 마셨고, 아들 심리검사에만 열중했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오는 까만 점이 있었다. 하얀 천장에 검정 점 하나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 점을 흰 검정이라 부르기로 했다. 흰 검정은 따개비처럼 붙어 있었다. 목은 계속 아파 왔고 마른기침이 나왔다. 환자들은 나를 노려보았다. 불편한 죄의식이 동아줄처럼 옭아맸다.

  기침이 심해지자 수간호사는 나를 보는 눈초리가 가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오전에 4인실에서 1인실로 병실을 옮겼다. 1인실은 격리실이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자가격리 시설에 들어가면 독방을 사용한다는 풍문은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비록 확진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격리 생활은 이곳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고 추측했다. 철제 침대와 서랍장, 세면대가 방 안의 전부였다. 천장에는 카메라가 감시자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사생활이 전부 노출된다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아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짐을 꺼내 서랍 안에 넣었다. 그런데 잠시 뒤 수간호사가 얄궂은 선원처럼 들어왔다. 그는 가방검사를 하더니 어판장에 고기를 내려놓는 사람처럼 스프링 노트와 샤프, 볼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살 위험이 있는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날카로운 물건이나 끈 등은 휴대할 수 없다며 딱 부러지게 말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도 가져올 수 없었다. 일반 병동에는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이곳은 텔레비전조차 없었다. 세상의 정보와 단절된 곳, 가족과 만남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만남은 지정된 면회 일에만 가능했다. 기침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나는 아들을 놔두고 외출을 신청했다. 담당의는 허락했고 마스크를 쓰고 바깥으로 나왔다. 봄 공기는 따뜻했다.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올봄은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차를 몰아 집 근처 이비인후과 의원을 찾았다. 의사는 편도선 염증이 있다며 항생제를 처방했다. 그제야 나는 불안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정신과 병동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약 효과는 매우 좋았다. 그리고 하루 만에 증상은 씻은 듯이 나았다. 격리실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수간호사는 내 증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경계의 눈빛을 없앴다. 마스크를 쓰고 복도에 유일하게 걸려 있는 거울 앞에 섰다. 정신과 환자가 아닌 보호자 처지에서 병동에 들어섰을 때 기분이랑, 환자가 되어 병동에 서 있는 기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코로나 확진자가 되면 그들의 마음은 마녀사냥을 당한 것처럼 처참하고 괴로울 것이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랄까? 등대 같은 거울 앞에서 주위를 살피며 해방의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바위섬처럼 솟은 빌딩 사이로 해가 어둠의 어깨에 올라탔다. 뱃고동처럼 기상 음악이 나왔다. 흰 비늘을 드러낸 물고기처럼 환자들이 유유히 복도로 나왔다. 흰 마스크를 쓴 열일곱 살 승엽 군은 얼마나 더 가벼워지길 꿈꾸었을까? 전날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바깥에서 한 달 동안 곡기를 끊고 쓰러져서 구급차로 실려 왔다. 바짝 마른 몰골은 안쓰러웠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승엽 군이 먼저 아들에게 같이 놀자고 제안했다. 보드게임은 부루마블과 루비 큐브가 전부였다. 아들은 작업실에서 형과 함께 노는 재미를 느꼈다. 이윽고 다른 어린이 두 명까지 합세해 네 명이 놀이에 합세했다. 아이들은 역시 함께 어울릴 때 제일 보기 좋다. 코로나 사태로 신학기 개학은 연장되었다. 아이들은 벗을 그리워했다.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일상이 그토록 소중했다는 걸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현실을 충실히 사는 게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여기며 예까지 왔다. 아이들도 관계 안에서 외로움을 잘 견뎌냈다. 점심시간에는 복지사 두 명이 찾아왔다. 복지사는 환자들과 대화를 통해 오늘 하루 감정이 어땠는지 살피고, 그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끄집어내도록 경청했다. 환자들은 복지사들이 건네는 유머나 위트를 통해 서먹한 거리를 깨고 마음을 열었다. 복도 중앙에는 책장이 있었고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대부분 심리학 서적이었다. 학생들은 자존감을 높이는 서적을 골라 읽었다. 아들은 병동에 오기 전, 게임기와 스마트폰 반입이 거절되자 금단현상처럼 기계에 대한 집착이 컸다. 그러나 기계가 없어도 아들은 잘 지냈다. 잠을 자거나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전공의가 나를 찾았다. 전공의는 항해 지도처럼 생긴 종이 묶음을 내 앞에 펼쳤다. 아들의 종합심리검사 결과지였다. 아들의 최종 병명은 조울증(양극성 장애)이었다. 그러나 심하지는 않았다. 정신장애를 극복한 환자들의 사례를 들면서 전공의는 나를 안심시켰다. 약물치료가 제일 큰 치료법이었다. 

  의사와 이야기를 마칠 즈음, 밤이 이슥했다. 환자들은 다시 깊은 수면으로 들어갔다. 그 시간은 모두에게 자유롭다. 나 또한 격리실 침대에 누워 침잠한다. 아들도 잠들었다. 숨을 길게 내뱉었다. 침대는 내가 항해하는 배다. 이 배에서 나는 어떤 꿈을 담고 망망대해를 건너야 하는가?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하지 않아 예까지 오지 않았는지 되묻는다. 질문이 없었던 삶은 비릿하면서도 축축하게 미끄덩거렸다. 내 감정을 타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아 오해와 불신을 일으켰고, 관계 안에서 틀어지고 뭉개져서 남 탓하며 후회하던 날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제는 아들과 나의 관계를 잘 정비해야 한다. 나는 아들을 대양에 보내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시킨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좌절하지 않고, 선박을 잘 조정하는 선원처럼, 멀리 내다보고 길을 잃지 않도록 등대 같은 어머니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아들도 가끔은 흔들리고 물벼락을 맞는다. 괜찮다고, 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 그깟 정신장애라는 파도도 역경으로 받아들이고 이겨내야 한다고. 섬과 섬이 닿을 수 없고, 배와 간격을 두어 행로가 막혀도 진정한 배는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배가 승리하는 거라고 알려주련다. 아들은 이곳 정신과 병동에서 아픔이 있는 환자들과 어울리면서 느낀 경험을 샛별처럼 끌어안을 것이다. 그 샛별이 바다 같은 사회에서 언젠가는 아름답게 돋보일 날이 올 것이다. 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아들을 깊이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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