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는 시댁에 큰일이 있었다. 요양원에서 지내시던 시할머니께서 요양 병원으로 거처를 옮기셨는데, 연로하신 탓인지 갑작스레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광주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일요일 오전에 병문안 예약을 해놓고 토요일 밤에 시부모님이 계신 완도에 미리 내려가 있으려 했다. 그런데 완도에 도착하기 무섭게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니 지금 당장 광주로 올라가자는 게 아닌가. 완도에서 광주까지 차로 2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인데, 출발한 지 30분 남짓 지났을 때 시어머니께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니 돌아가셨대. 병원으로 가지 말고 장례식장으로 가야 할 것 같다..."
나는 할머님과 추억이랄 게 없을 정도로 만남이 적었지만 남편에게 있어서 할머니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는 알고 있다. 남편이 갓 태어났을 무렵, 시부모님께서 서울에서 일하시느라 너무 바쁘셔서 5~6살 정도까지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고 한다. 한 사람의 무의식 속 많은 부분이 결정된다는 시기를 해남에서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것이다. 할머니는 남편을 "우리 장손"이라 부르셨다고 했는데, 얼마나 끔찍이 아끼셨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 할머니를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보내드려야 했으니 마음이 헛헛할 만도 했을 텐데 남편은 갑작스러운 집안 일로 나와 동서가 고생하게 될까만 걱정하기 바빴다. 게다가 다른 사촌들은 와서도 식당에서 쉬거나 손님맞이를 돕는 정도였는데, 남편은 장손이라는 이유로 어른들 틈에 계속 불려 왔다 갔다 하느라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도 내 마음 한편에는 '당장 월요일부터 한의원은 어떻게 해야 하지? 꼭 처리해야 하는 일도 있고, 환자분들께도 알리고 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컸다.
남편과 상의 끝에 일요일 저녁 혼자 천안에 올라왔다. 월요일 아침 출근해 반나절 동안 뵐 수 있는 환자 분들 진료를 보면서 밀려있던 한약을 달였고, 임시 휴진 안내문을 만들어 한의원 출입구 곳곳에 붙였다. 최근 내원하셨던 환자분들 명단을 추려 휴진 안내 문자도 돌렸다.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광주로 돌아가 다음날 발인까지 무사히 마쳤는데, 할머님 마지막 가시는 길이라도 함께 하길 잘했다 싶었다.
장례를 마치고 한의원에 돌아왔을 땐 갑작스레 자리를 비워 환자분들께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번거롭진 않으셨을까, 미처 연락을 받지 못하시고 헛걸음하신 분은 없으셨을까...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다. 오히려 환자분들께 더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원장님, 애사가 있으셨나 봐요. 잘 치르고 오셨어요?"
"이 더운 날 얼마나 고생하셨을까요."
"한 사람을 떠나보낸 다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니지요?"
원장 한 명과 직원 한 명으로 돌아가는 아주 작은 한의원이라 항상 이런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것과 한 명만 빠져도 휘청거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살다 보면 분명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하지만 무슨 일이든 어떻게 될지 몰라 짐작만 하고 있을 때가 가장 두려운 법이다. 막상 그 일이 닥치면 어떻게든 해결되기 마련이니까.
이번 일을 겪으며 세상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너그럽다는 걸 배웠다. 내 사정을 이해해 주시는 일가친척들, 번거로움을 감수하시고도 한의원 일정에 맞춰 내원하시는 환자분들, 함께 놀라고 걱정해 주시는 하나뿐인 직원까지.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내가 보기엔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데에도 온 마을이 힘쓰고 있는 것 같았다. 때론 무심하고, 무관한 것 같아 보여도 사람에게 일어나는 기쁘고 슬픈 일에 대해서 모두가 공감하고 배려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할머니, 빨리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남편을 사랑으로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할머니의 사랑 덕분에 남편이 바르게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부족한 게 많은 손주 며느리인데, 할머님 덕분에 세상의 좋은 면들을 또 하나 배워갑니다. 앞으로도 남편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