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 Jan 04. 2025

새해 흰 구름 아래

어른의 글쓰기

얼마 전 한 환자분께서 발바닥에 부항을 떠보고 싶다고 한의원에 오셨다. 1년 전쯤부터 발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에 물집이 찬 것처럼 불편한 느낌이 드는데, 어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진료를 봐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견만 들어 답답하다는 사연이었다.


가끔 이렇게 뭐라 표현하기 참 애매한 증상들이 있고, 특히 영상 검사상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을 때 그 증상은 너무 쉽게 소외된다. 환자는 분명히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데도 말이다. 다발바닥 쪽은 살이 적어 부항이 붙지 않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사혈을 하려면 란셋으로 여러 자락을 해야 하는데 통증이 아주 심한 부위라 걱정이 앞섰다.


"환자분 혹시 발바닥에 침을 맞아보신 적이 있으실까요? 너무 아픈 부위이기도 하고 부항이 붙지 않을지도 몰라서요."


불행 중 다행(?) 이도 수년 전 족저근막염에 걸려 1년 넘게 발바닥에 침을 맞아 보신 경험이 있다고 하셔서 사혈 후 부항을 붙이는 시술인 습부항을 해드렸다. 치료를 모두 마치고 난 후 환자분께서 연신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셨다. 아마도 나를 번거롭게 했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통증이 심하지 않으셨다니 오히려 다행입니다. 그럼 오늘은 이렇게 치료를 마무리할게요. 다음 주에 다시 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원장실로 돌아와 앉아있는데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이 기분 참 좋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건 누군가에게 고마운 존재가 됐을 때 느끼는 기쁨이었다. 그리고 문득 몇 주 전 내가 환자가 되어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던 장면도 함께 떠올랐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던 나를 따뜻하게 다독여 주신 원장님. 수술대에 누워 하염없이 울고 있을 땐 간호사 선생님이 내 곁에서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 주셨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에게도 수술이 끝나고 나오셔서 이후 경과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다고 한다.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때론 타인의 수고로움을 통해 고마운 마음을 가득 받고, 때론 내 수고로움으로 누군가를 도와드릴 있는 것. 고마움 안에 녹아 있는 노고와 책임감까지 이해하게 되는 것.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이 이런 모습 아닐까.




<가을 흰 구름 아래>라는 시에서 나태주 시인도 "사는 동안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며 치열하게 고민한다. 이런 것이었을까, 저런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그건 아니었을 거라고 미소 짓는 흰 구름의 답을 들으며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모양일까 생각해 보게 됐다.


사람들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그중에서도 고마운 마음, 어쩌면 결국엔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다 말한다면 새해의 흰 구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리타분하고 바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난 그 마음이 참 좋다.



<가을 흰 구름 아래>


힘겹게 다시 열린 넓고 푸른 가을하늘,

높이 걸린 흰 구름 보며 생각는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며 칭찬받는 아이?

직장에 취직하여 돈 벌고 승진하는 어른?

예쁘고 마음씨 고운 여자하고 결혼하여

아이 낳아 기르며 가끔은 부부싸움도 하는 남편?


아니라고, 그것은 아닐 것이라고 흰 구름이

보일 듯 말듯 고개를 흔들어준다


그렇다면 좋은 아파트 사서 이사하는 것?

친한 친구들과 만나 크게 떠들며 웃으며

밤새워 술 마시는 것?

낯선 나라로 커다란 가방 들고 여행 떠나는 것?


이번에도 흰 구름은 아닐 거라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고개를 주억거려준다


모르겠다, 나에게 정말 필생의 사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내가 믿었던 대로 시인이 되어 이름을 내고

여러 권의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해줘도

흰 구름은 분명 아니라고, 아닐 것이라고

조그맣게 웃음 지어줄 것만 같다


나태주 지음. (2006.9.1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